《太初历》《三统历》:朔策与闰周的误差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汉武帝太初元年,公元前一〇四年,汉朝换了一部历法。

换历这件事,史书记下来的是礼仪与德运:改正朔、易服色、封禅、改元。历法本身怎么算,纸面上剩下的只有一串数。这串数收在《汉书·律历志》里,标题叫「统母」——「母」是立法的根本,后面的推算都从这个母数生出来。

统母里有两个数最要紧:一个管一个月有多长,一个管几年插几个闰月。前者古人叫朔策,后者叫闰周。这两个数只要偏一点,日子就会一年一年地错开,错到最后,历书上写着初一,天上却是晦日。

这篇文章讲的就是这两个数:它们怎么定的,偏在哪里,什么时候被人发现。

一、太初改历,换的不是一年,是一把尺

秦与汉初用《颛顼历》,以十月为岁首。汉朝接手,没有改,一路用到汉武帝。

到太初元年,改了。改的第一件事是岁首:从十月挪回正月。这件事在《史记》《汉书》里都记着,前一篇《「颛顼历」与秦至汉初历法的考古证据》已经谈过,这里不重复。

要补的是第二件事,也是更容易被忽略的一件:这次改历不只挪了岁首,还把「一日切成几份」这件事重新定了。

古人算历,不用小数,用分数。一日切成多少份,叫日法。日法一定,一个月、一年都只能落在这些份数的格子上。太初改历把日法定在八十一。

八十一这个数不是随手写的。《汉书·律历志》开篇讲统母,第一句就交代了它的来路:

日法八十一。元始黄钟初九自乘,一龠之数,得日法。

黄钟是律管之名,初九是《易》的阳爻之数,九自乘得八十一。一根律管的容积,一龠,也正好是八十一分。所以八十一在汉代是「数出有故」的数:它从乐律与卦爻里来,不是从天上量出来的。

这一点很要紧。历法要合天,可制历的人手里握着的尺子,先是一把数术的尺子。后面的偏差,根子在这里。

二、《太初历》与《三统历》:一套数,两个名

这里有个容易绕晕的地方:太初年间改的那部历,叫《太初历》;后来收进《汉书》的那套完整算法,叫《三统历》。两个名,一套数。

《后汉书·律历志》追述这段,用的是后一个名:

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施行百有余年,历稍后天,朔先于历,朔或在晦,月或朔见。

「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后人把太初元年起的这整套系统,直接称作《三统历》。这个称呼与刘歆有关。刘歆在西汉末年整理历法,替这套数配了一整套「三统」的说法:天统、地统、人统,黑统、白统、赤统,一一对应到夏、殷、周三代。数还是那些数,说法换了。

所以读汉代历法,看到「太初」与「三统」并列,不必当成两部历。它们的分量差别在名号,不在数字。

三、朔策:一个月是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

《汉书·律历志》的统母,把要用的数一次列齐:

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闰法十九,因为章岁。……章月二百三十五。……统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

七组数,各有各的用处。与月长直接相关的是前两个: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

日法是把一日切成八十一份,月法是一个月占多少份。二千三百九十二份,摊到八十一片一日里头,就是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日。这一步不是我在算,汉代人自己就这么读:一个月二十九天半多一点,剩下那半天的零头,记成八十一分之四十三。

为什么不再细分?因为日法就定在八十一。分母定了,格子就定了。天上的朔望月不会照着人的分母走,人只能把最近的格子认作它。

八十一分之四十三这个零头,后来成了汉代历法的一个标志,连名字都由此而来:八十一分法。制历的人对自己的这个分母很得意,《汉书》把它摆在统母第一条,还专门解释了它从黄钟来的道理。

四、闰周:十九年七个闰月

第二个数是闰周。

阴历十二个月,比一个回归年短。短出来的日子攒上两三年,就够一个月,于是要插一个闰月。几年插几个,是历法的大关节:插多了,季节往前赶;插少了,季节往后拖。

汉代的办法是十九年七个闰月。统母里两条记载说的就是这件事:闰法十九,章岁十九;章月二百三十五。

二百三十五这个数怎么来的,古人写在《汉书》的注里,也写在《后汉书》的注里:十九年,每年十二个月,得二百二十八个月;再加七个闰月,正好二百三十五。一章十九年、二百三十五个月,一章之内七个闰月——这就是十九年七闰。

这套办法的道理是:十九个回归年的长度,与二百三十五个朔望月的长度,差不多相等。差不多,不是相等。古人知道这一点,所以叫它「章」,一章之后朔旦与冬至又回到同一天,可这只在同一章之内成立;章与章之间的余数,还得往下攒。

《汉书·律历志》在统母之外还记了「朔望之会百三十五」,记了「会月六千三百四十五」,都是为了处理这个「攒下来的余数」——日食月食要在朔望上发生,朔望对不上,交食的日子就对不上。一层一层往上加周期,加到「统」、加到「元」,本意都是想把余数收干净。

收不干净。这是后话。

五、误差什么时候显形

太初历行了一百多年,问题出来了。

《后汉书·律历志》把这段写得很清楚,先总说一句:

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施行百有余年,历稍后天,朔先于历,朔或在晦,月或朔见。

「历稍后天」是历法走得慢了:天上已经到了那个位置,历书上还没到。「朔先于历」是朔日抢在历书前面:历书上写着还没到初一,天上已经是看不见月亮的晦日。最后一句最直白:朔或在晦,月或朔见——该是初一的那天,天黑得看不见月亮;该看不见月亮的那天,一弯新月已经挂上来了。

这不是算出的小差,是看得见的小差。

到东汉章帝元和二年,差得更多:

至元和二年,《太初》失天益远,日、月宿度相觉浸多,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未至牵牛五度,而以为牵牛中星,后天四分日之三,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

冬至那天太阳该在斗宿二十一度,历书却还写着牵牛中星。晦朔弦望差了一整日,宿度差了五度。差到「候者皆知」——不是一两个人算出来,是观候的人都知道。

章帝于是下诏改历。诏书里有一句,把病根点得很准:

史官用太初邓平术,有余分一,在三百年之域,行度转差,浸以谬错。

「有余分一」——这套数里带着一个除不尽的余数。余数不大,一年看不出来;「在三百年之域」,攒到三百年就显出来了。诏书还引了一句谶纬:「三百年斗历改宪」。这句话既是预言,也是事后的注解。

改历的结果是行《四分历》。但改完还有争论。编訢、李梵主张「元首十一月当先大」,理由是要让弦望落在固定的日子上。反对的人指出的正是闰周上的毛病:

而訢、梵犹以为元首十一月当先大,欲以合耦弦望,命有常日,而十九岁不得七闰,晦朔失实。

「十九岁不得七闰」——十九年七个闰月这个周,到这时候已经配不上了。闰周一乱,晦朔就失实。争到最后,章帝裁定「天元始起之月常小」,把起点那个月定为小月。

六、拿日食来对表

改历之争里,最硬的一份材料是贾逵的统计。

贾逵把《太初历》算出来的朔,拿去对史书记载的日食。日食必在朔,所以日食落在哪一天,是检验朔策的一把现成的尺子。他分三段数:

以《太初历》考汉元尽太初元年日食二十三事,其十七得朔,四得晦,二得二日;……以《太初历》考太初元年尽更始二年二十四事,十得晦;……以《太初历》考建武元年尽永元元年二十三事,五得朔,十八得晦。

第一段,汉元年到太初元年,二十三事里头,十七件事对上了朔。第二段,太初元年到更始二年,二十四件事,十件落在晦。第三段,建武元年到永元元年,二十三件事,只有五件得朔,十八件得晦。

三段摆在一起,趋势一目了然:越往后,对上的越少。同一个历法,同一把尺子,前期还算合手,后期就一路偏下去了。

这份统计的方法本身也值得一说。它不去比「差了几刻几分」,只比「落没落在朔这一天」。这是汉代人能做的检验:他们没有精到分钟的记录,有的是史书里「某年某月某日食」这一行字。把这一行字拿来与历书对,对不上就是对不上,赖不掉。

顺带说一句,贾逵同时用新立的《四分历》对同一批日食,结果另记一份。这就是改历之争的实际打法:不比谁的道理好听,比谁对上的多。

七、为什么八十一分法会偏

回到根子上。

八十一分法的问题,不在于八十一这个数算错了,而在于它太粗。一日切成八十一份,一份就是一日之八十一分之一。一个月只能落在这些格子的某一个上,最近的格子,未必就是天上那个月。

今测一个朔望月,约二十九日半多一点,落在两格之间。八十一分法取的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是靠近它的一格。一格之差看着小,可一个月差一点,十二个月就差一截;差上一百多年,历书上的一天就整个挪了位。《后汉书》说的「朔先于历」「朔或在晦」,就是这么来的。

闰周也是一样。十九年七闰,是把十九个回归年与二百三十五个朔望月当作一样长。实际上两者不一般长,差数一年一年攒。攒到「十九岁不得七闰」,这个周就维持不住了。

这两处偏,方向还不一样:月长偏一点,朔望的日子就慢慢挪;闰周偏一点,季节与月份就慢慢脱开。两处一起偏,历书上的年月日就三头不对。

改行《四分历》,日法改成四,一个月是二十九日又九百四十分之四百九十九——分母换大了,格子密了,落点就准一些。但这也只是把格子做细,没有把「用分数去追天上那个月」这条路换掉。这条路一直走到唐代,一行才改用不等间距的二次差算法。

八、哪一部分能核,哪一部分只是推

分两面说。

能核的:统母那七组数,白纸黑字写在《汉书·律历志》里,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闰法十九、章月二百三十五、统法一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这七个数彼此咬合,不是后人补的。改历的年份、下诏的理由、编訢李梵的争论、贾逵的三段统计,也都记在《后汉书·律历志》里,可以逐句对。

不能核的:太初改历当时用的观测记录。落下闳、邓平他们量了什么、量了多少次、误差多少,史书没有留下数据。今天知道的只是结果——他们选了八十一,选了十九年七闰,选了那些分数。为什么是这个数不是那个数,除了《汉书》给的「黄钟」一说,没有别的凭据。

【一说】八十一这个分母取自黄钟律数,是数术上的自证,不是天文上的理由。制历的人先在数术里找好一个漂亮的数,再让历法去迁就它。这个说法能解释统母的排列,但没有直接证据说明当时的人就是这么想的。

还有一层要分清:这篇文章说「偏」,说的是以今天的测量为准。汉代人自己在太初年间并不觉得偏,他们觉得这部历比《颛顼历》准得多——事实也是如此。偏差是一百多年后才显形的,不是历法一颁行就错。把后人看到的偏差倒推回去,说当时的人算错了,这不公平。

A&Q

问:《太初历》和《三统历》是两部历法吗?

答:通常当作一套数的两个名。太初元年(前 104)改历行用的叫《太初历》;西汉末年刘歆把这套数配上「三统」的说法整理成完整系统,收在《汉书·律历志》里,后世称《三统历》。《后汉书·律历志》追述时直接写「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把两个名并成了一件事。

问:八十一分法为什么叫这个名字?

答:因为它把一日切成八十一份,一个月的零头记成八十一分之四十三。《汉书·律历志》统母第一条就是「日法八十一」,并解释这个数来自黄钟初九自乘、一龠之数。

问:十九年七闰是怎么定的?

答:十九个回归年的长度,与二百三十五个朔望月的长度大致相等。一章十九年、二百三十五个月,其中十二个月一年、共二百二十八个月,余下七个月作闰月。这就是十九年七闰。它是近似,不是恒等。

问:误差是怎么发现的?

答:先由观候发现。《后汉书·律历志》记「历稍后天,朔先于历,朔或在晦,月或朔见」——历书上写的初一,天上已经是晦日。到元和二年,「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候者皆知。再用日食对表:贾逵把《太初历》算的朔拿去对史书记载的日食,前期二十三事对上十七,后期二十三事只对上五。

问:既然偏了,为什么还用了百余年?

答:因为它比前一部准。《太初历》取代《颛顼历》,是因为《颛顼历》「疏阔中最为微近」而积久更疏;《太初历》的八十一分法在当时是更密的格子。偏差是百余年攒出来的,不是一颁行就错。

问:《四分历》改了什么?

答:日法从八十一改成四,一个月的零头改记成九百四十分之四百九十九。分母变大,格子变密,落点更贴天上的月。但它仍然是用分数去追月,这条路要到唐代一行改用二次差算法才换掉。


邝楚嘉按:这一篇讲的两个数,看着是技术细节,其实是汉代人做学问的样子。他们先用律数定分母,再用分数去贴天;分母一定,格子就定了,天上那个月只要落在两格之间,就注定要偏。可贵的地方在于,他们没有把偏赖掉。《后汉书》把那句「朔或在晦,月或朔见」照实写下来,贾逵把二十三件事里只对上五件的账也照实记下来。一部历法行了一百多年,最后是它自己的记录把它推下台的。读古代历志,最值得留意的往往不是那些漂亮的数,而是这些照实写下的对不上。


引用与出处

[1] 史记[M]. 汉.
[2] 汉书[M]. 汉.
[3] 后汉书[M]. 南朝宋.
[4] 资治通鉴[M].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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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력(太初曆)』『삼통력(三統曆)』 — 삭책(朔策)과 윤주(閏周)의 오차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Chujia Kuang(邝楚嘉)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요지

기원전 104년, 한(漢)의 조정은 역법(曆法)을 바꾸었다. 그 개력(改曆)에 대해 전하는 기록은 의례(儀禮) 쪽은 얇고 산수(算數) 쪽은 두껍다. 남아 있는 것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의 「통모(統母)」라는 제목 아래 놓인 한 벌의 상수(常數)다. 여기서 「모(母)」란 이후의 모든 수가 그로부터 나오는 근본수를 말한다. 이 가운데 둘이 뒷일의 성패를 가른다. 하나는 한 달의 길이를 정하고, 하나는 몇 해 안에 몇 개의 윤달(閏月)을 두는지를 정한다. 이 글은 그 둘을 읽고, 이어서 그 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기록을 읽는다. 역법(曆法)은 백여 년을 돌았고, 이윽고 사서(史書)는 삭(朔)이 역(曆)보다 먼저 온 일, 역이 삭일(朔日)이라고 적은 날에 달이 보이지 않은 일을 쓰기 시작한다. 원화(元和) 2년(85년), 조정은 역법(曆法)이 하늘에서 꼬박 하루 어긋났음을 인정한다. 그 증거로 내놓은 것은 새로운 관측이 아니라 오래된 기록이었다. 사서(史書)에 이미 적혀 있던 일식(日食)을, 역법(曆法)이 그것을 삭일(朔日)에 두었는지의 여부로 분류한 것이다. 이 글은 그 감사를 따른다. 결론은 좁다. 태초(太初)의 상수(常數)는 내부에서 맞물려 있었고 당시 얻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동시에 만들어질 때부터 거칠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기록 자신이 기록의 말로 말하고 있다.

키워드: 태초력(太初曆); 삼통력(三統曆); 삭책(朔策); 윤주(閏周); 19년 7윤(閏);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 가규(賈逵); 일식(日食); 중국 역법(曆法)

머리말

기원전 104년, 한(漢)의 조정은 역법(曆法)을 바꾸었다. 사서(史書)가 적어 둔 것은 의례(儀禮)와 덕운(德運)이다. 새 정월, 새 복색(服色), 새 연호(年號). 어떻게 계산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그 부분은 다른 곳에 남아 있다. 표(表)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는 그 상수(常數)를 「통모(統母)」라는 말 아래 늘어놓는다. 통모(統母)란 체계의 어머니다. 역법(曆法) 안의 수는 모두 여기서 나온다. 일곱 개의 수가 한 단락에 모여 제시되고, 그중 둘이 역법(曆法)의 맞고 틀림을 가른다.

첫째는 한 달의 길이. 둘째는 윤주(閏周), 곧 몇 해 안에 몇 개의 여분 달을 끼워 넣는가다.

둘 다 산(算)으로 정해졌다. 측량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둘 다 조금씩 틀렸다. 이 글이 다루는 것은 그 「조금」이 얼마만 한지, 그리고 어떻게 발견되었는가다.

발견한 방식이 흥미롭다. 철학자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아전(衙前)이 두 목록을 맞대어 발견했다. 하나는 역법(曆法)이 「달이 어둡다」고 적은 날의 목록, 다른 하나는 사서(史書)가 「해가 먹었다」고 적은 날의 목록이다. 일식(日食)은 삭(朔)에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기록된 일식(日食) 하나하나가 역법(曆法)의 삭(朔)을 공짜로 시험하는 시험이 된다. 그리고 한(漢)의 사서(史書)는 이백 년 동안 일식(日食)을 적어 두었다.

1. 태초(太初)의 개력(改曆)이 바꾼 것은 해가 아니라 자였다

진(秦)과 한(漢) 초기는 『전욱력(顓頊曆)』을 썼고 세수(歲首)를 시월(十月)에 두었다. 한(漢)은 이를 이어받아 고치지 않고 무제(武帝)의 대까지 그대로 썼다.

태초(太初) 원년, 고쳤다. 첫 작업은 세수(歲首)를 시월(十月)에서 정월(正月)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이는 이 연재의 앞 글 『「전욱력(顓頊曆)」과 진(秦)·한(漢) 초기 역법(曆法)의 고고학적 증거』에서 다루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작업은 덜 주목되지만 이하의 논의에는 더 무겁다. 이 개력(改曆)은 세수(歲首)만 옮긴 것이 아니다. 하루를 몇으로 나누는가, 그 눈금 자체를 다시 정의했다.

한(漢)의 역가(曆家)는 소수를 쓰지 않는다. 분수(分數)를 쓴다. 하루를 몇으로 자르는가, 그 수를 「일법(日法)」이라 불렀다. 일법(日法)이 정해지면 한 달도 한 해도 그 눈금 어딘가에 착지해야 한다. 한 달을 29.53일이라고 쓸 수는 없다. 81분의 1의 정수배로만 쓸 수 있다.

태초(太初)의 개력(改曆)은 일법(日法)을 81로 정했다.

81은 우연한 수가 아니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는 그 유래를 표의 첫 줄에서 밝힌다.

日法八十一。元始黄鐘初九自乘,一龠之数,得日法。

81은 9의 제곱이다. 9는 『역(易)』의 양효(陽爻)의 수. 표준 율관(律管)인 황종(黃鐘)은 한 약(龠)을 담고, 한 약(龠)은 81분. 즉 이 분모(分母)는 하늘에서가 아니라 악률(樂律)과 괘효(卦爻)에서 나왔다.

여기가 이 글 전체의 요점이다. 역법(曆法)은 하늘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역가(曆家)의 손에 있는 자는 먼저 수술(數術)의 자였다. 한 세기 뒤에 나타나는 오차(誤差)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2. 『태초력(太初曆)』과 『삼통력(三統曆)』 — 한 벌의 수, 두 개의 이름

먼저 혼동 하나를 풀어 둔다. 태초(太初) 연간에 바꾼 역법(曆法)을 『태초력(太初曆)』이라 부른다. 『한서(漢書)』에 수록된 완전한 산법(算法)을 『삼통력(三統曆)』이라 부른다. 두 이름, 한 벌의 수다.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는 돌아보며 첫해에 대해서도 나중 이름을 쓴다.

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施行百有余年,曆稍後天,朔先於曆,朔或在晦,月或朔見。

「태초(太初) 원년부터 『삼통력(三統曆)』을 쓰기 시작했다」 — 후대의 필자는 그 체계가 뒤에 얻은 이름으로 전체를 불렀다. 이 이름은 유흠(劉歆)과 이어진다. 전한(前漢) 말에 역법(曆法)을 정비한 유흠(劉歆)은 그 수에 「삼통(三統)」의 이치를 입혔다. 천통(天統)·지통(地統)·인통(人統), 흑통(黑統)·백통(白統)·적통(赤統)을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맞춘다. 수는 그대로다. 어휘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한(漢)대 자료에서 「태초(太初)」와 「삼통(三統)」이 나란히 있어도 두 역법(曆法)이 아니다. 차이는 이름에 있고 산(算)에는 없다.

3. 삭책(朔策) — 한 달은 29일과 81분의 43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의 통모(統母)는 필요한 수를 한꺼번에 늘어놓는다.

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閏法十九,因為章歲。……章月二百三十五。……統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

일곱 상수(常數), 각각에 제 몫이 있다. 달의 길이에 직접 관계되는 것은 처음 둘. 일법(日法) 81, 월법(月法) 2392다.

일법(日法)은 하루를 81로 자른다. 월법(月法)은 한 달이 그 몇 개인지를 말한다. 2392개를 81로 나누면 29일과, 81 가운데 43이 남는다. 이것은 현대의 복원이 아니다. 한(漢)대의 독자가 그렇게 읽었다. 한 달은 29일 반에서 조금 더. 그 반나절의 나머지를 81분의 43으로 쓴다.

왜 더 잘게 나누지 않는가. 일법(日法)이 이미 81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분모가 먼저 정해지고, 눈금이 정해지고, 달은 그 가장 가까운 눈금에 맞추어진다.

81분의 43이라는 나머지는 한(漢)대 역법(曆法)의 표지가 되었고, 체계의 통칭도 되었다. 81분법(八十一分法)이다. 역가(曆家)는 이 분모를 자랑스러워했다. 『한서(漢書)』는 그것을 표의 맨 앞에 두고, 황종(黃鐘)에서 온다는 도리를 일부러 설명한다.

4. 윤주(閏周) — 19년에 일곱 개의 윤달(閏月)

두 번째 상수(常數)는 윤주(閏周)다.

태음력(太陰曆)의 열두 달은 태양년(太陽年)보다 짧다. 짧은 몫이 쌓이면 두세 해에 한 달 분이 된다. 그래서 윤달(閏月)을 끼운다. 몇 해 안에 몇 개를 끼우는가는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의 큰 관절이다. 너무 많이 끼우면 계절이 달보다 앞서 달리고, 너무 적게 끼우면 계절이 뒤진다.

한(漢)의 답은 19년에 7윤(閏)이었다. 통모(統母)의 두 항목이 그것을 말한다. 윤법(閏法) 19, 곧 장세(章歲) 19. 장월(章月) 235.

235가 어디서 오는지는 한(漢)의 주(注)가 적고 있다. 19년, 해마다 열두 달이면 228개월. 여기에 윤달(閏月) 일곱을 더하면 235. 한 장(章)은 19년·235개월이고, 그 안에 일곱 개의 윤(閏)이 있다. 이것이 19년 7윤(閏)이다.

이 주기의 이치는 19태양년(太陽年)이 235삭망월(朔望月)과 거의 같다는 데 있다. 거의 같다는 것이지 같다는 것이 아니다. 한(漢)대 역가(曆家)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주기를 「장(章)」이라 불렀다. 한 장(章)에서 구분이 지어지고 다시 열린다. 한 장(章) 안에서 삭단(朔旦)과 동지(冬至)는 같은 날로 돌아온다. 장(章)의 끝에 남는 나머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장(章)으로 넘어간다.

『한서(漢書)』는 다시 「삭망지회(朔望之會) 135」를 들고, 다시 회월(會月) 6345를 든다. 바로 이 넘김을 다루기 위해서다. 식(食)은 삭망(朔望)에 일어난다. 삭망(朔望)이 어긋나면 예보하는 식(食)도 어긋난다. 장(章)·통(統)·원(元)으로 주기를 쌓아 올린 것은 나머지를 다 흡수해 보려는 것이었다.

흡수되지 않았다. 그것이 다음 절의 이야기다.

5. 오차(誤差)는 언제 모습을 드러냈는가

태초력(太初曆)은 백여 년을 돌았다. 이윽고 기록은 어긋났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는 먼저 총괄해 말한다.

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施行百有余年,曆稍後天,朔先於曆,朔或在晦,月或朔見。

「역(曆)이 조금 하늘에 뒤진다」는 것은 하늘은 이미 그 위치에 닿았는데 역(曆)이 아직 닿지 않은 것. 「삭(朔)이 역(曆)보다 앞선다」는 것은 역(曆)이 아직 앞 달이라고 하는데 하늘은 이미 달이 어두운 날이 된 것. 그리고 가장 평이한 한 구절 — 역(曆)이 삭(朔)이라고 적은 날에 달이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역(曆)이 달이 어두운 날이라고 한 날에 가느다란 달이 걸려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분·초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보고 아는 이야기다.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에는 벌어진 폭이 더 컸다.

至元和二年,『太初』失天益遠,日、月宿度相覺浸多,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未至牽牛五度,而以為牽牛中星,後天四分日之三,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

동지(冬至) 날 해는 두수(斗宿) 21도에 있어야 하는데 역(曆)은 아직 견우(牽牛)의 중성(中星)으로 두었다. 회삭현망(晦朔弦望)은 꼬박 하루 어긋났고, 수도(宿度)는 다섯 도 어긋났다. 「후자개지(候者皆知)」 — 한 사람의 영리한 사람이 찾아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던 사람들의 공통된 지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제(章帝)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 한 구절이 병근(病根)을 정확히 짚는다.

史官用太初鄧平術,有餘分一,在三百年之域,行度轉差,浸以謬錯。

「여분(餘分) 하나가 있다」 — 이 체계에는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나머지가 하나 있다. 나머지는 작다. 그러나 「삼백 년의 역(域)」 안에서 운행의 도(度)가 차차 어긋나고, 잘못이 스며든다. 조서(詔書)는 다시 참위(讖緯)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삼백 년에 두력(斗曆)이 개헌(改憲)된다」 — 삼백 년에 두(斗)의 역법(曆法)이 바뀐다. 이 구절은 예언으로 읽히고, 사후의 주석으로 작동한다.

개력(改曆)은 사분력(四分曆)을 택했다. 그러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편흔(編訢)과 이범(李梵)은 원수(元首)의 11월을 먼저 큰달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망(弦望)을 정해진 날에 맞추고 싶어서다. 반대한 사람들이 지적한 것은 윤주(閏周) 자체의 터진 곳이었다.

而訢、梵猶以為元首十一月當先大,欲以合耦弦望,命有常日,而十九歲不得七閏,晦朔失實。

「19세에 7윤(閏)을 얻지 못한다」 — 19년 7윤(閏)이라는 주기가 이제 닫히지 않는다. 주기가 깨지면 회삭(晦朔)도 깨진다. 다툼은 장제(章帝)의 재정(裁定)으로 매듭지어졌다. 천원(天元)이 시작하는 달은 항상 작은달로 한다, 고.

6. 일식(日食)에 맞대어 보다

개력(改曆) 논쟁에서 가장 단단한 자료는 가규(賈逵)의 통계다.

가규(賈逵)는 『태초력(太初曆)』이 계산해 낸 삭(朔)을 사서(史書)에 적힌 일식(日食)에 맞대었다. 일식(日食)은 삭(朔)에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기록된 일식(日食)은 그대로 삭책(朔策)의 시험이 된다. 그는 세 구간으로 나누어 세었다.

以『太初曆』考漢元尽太初元年日食二十三事,其十七得朔,四得晦,二得二日;……以『太初曆』考太初元年尽更始二年二十四事,十得晦;……以『太初曆』考建武元年尽永元元年二十三事,五得朔,十八得晦。

첫 구간, 한(漢) 원년부터 태초(太初) 원년까지 23건 가운데 17건이 삭(朔)에 맞았다. 둘째 구간, 태초(太初) 원년부터 경시(更始) 2년까지 24건 가운데 10건이 회(晦)에 떨어졌다. 셋째 구간, 건무(建武) 원년부터 영원(永元) 원년까지 23건 가운데 삭(朔)에 맞은 것은 겨우 5건, 18건이 회(晦)에 떨어졌다.

세 구간을 나란히 놓으면 경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같은 역법(曆法), 같은 자로, 처음에는 맞고 뒤에는 맞지 않는다.

이 방법 자체에도 한마디가 필요하다. 가규(賈逵)는 「몇 각(刻) 어긋났는가」를 묻지 않았다. 「삭일(朔日)에 떨어졌는가 아닌가」만 물었다. 그것이 한(漢)대에 실제로 할 수 있던 시험이었다. 분 단위로 정밀한 기록은 없지만, 「모년 모월 모일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 한 줄이면 이백 년 치가 있다. 그 한 줄을 역법(曆法)에 맞대면, 맞거나 틀리거나, 속일 수 없다.

덧붙이자면, 가규(賈逵)는 새로 세운 사분력(四分曆)으로도 같은 일식(日食)을 세어 그 결과를 따로 적었다. 개력(改曆) 논쟁의 실제 방식이 이것이다. 어느 쪽 이치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어느 쪽이 더 많이 맞는가를 세었다.

7. 왜 81분법(八十一分法)은 어긋났는가

뿌리로 돌아간다.

81분법(八十一分法)의 흠은 81이라는 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81이 너무 거칠다는 것이다. 하루를 81로 자르면 한 조각이 제법 길다. 한 달은 그중 하나에 착지해야 하고, 가장 가까운 눈금이 하늘의 그 달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현재의 삭망월(朔望月) 값은 두 눈금 사이에 있다. 81분법(八十一分法)은 가까운 쪽을 택해 29일과 81분의 43으로 두었다. 눈금 하나 분량은 작아 보인다. 그러나 한 달의 작은 오차는 한 해에 열둘이 되고, 한 해 열둘의 작은 오차가 백오십 년 쌓이면 역법(曆法)은 꼬박 하루 움직인다. 『후한서(後漢書)』가 「삭(朔)이 역(曆)보다 앞선다」「삭(朔)이 혹 회(晦)에 있다」고 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윤주(閏周)도 같은 이치로 깨진다. 19년 7윤(閏)은 19태양년(太陽年)과 235삭망월(朔望月)을 같다고 놓는다. 가까울 뿐 같지 않다. 차이는 해마다 쌓여, 기록의 말을 빌리면 「19세에 7윤(閏)을 얻지 못하고」, 주기는 닫히지 않는다.

두 어긋남은 방향이 다르다. 달 길이의 어긋남은 삭망(朔望)의 날을 서서히 움직인다. 윤주(閏周)의 어긋남은 계절과 달을 서서히 떼어 놓는다. 둘이 함께 어긋나면 해·달·날이 셋 다 어긋난다.

이를 고친 사분력(四分曆)은 일법(日法)을 4로 하고 한 달을 29일과 940분의 499로 두었다. 분모가 커지면 눈금이 촘촘해지고 착지점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것은 분수로 달을 쫓는 길을 바꾸지 않았다. 이 길은 당(唐)대에 일행(一行)이 등간격이 아닌 이차차(二次差) 산법(算法)을 도입할 때까지 이어졌다.

8. 어디까지 확인되고, 어디부터 추론인가

늘 그렇듯 두 면에서.

확인되는 것. 통모(統母)의 일곱 상수(常數)는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흑백으로 적혀 있다. 일법(日法) 81, 월법(月法) 2392, 윤법(閏法) 19, 장월(章月) 235, 통법(統法) 1539, 주천(周天) 562,120, 삭망지회(朔望之會) 135. 이 일곱은 서로 맞물려 있고, 뒤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개력(改曆)의 해, 조서(詔書)의 이유, 편흔(編訢)·이범(李梵)의 다툼, 가규(賈逵)의 세 구간 통계도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적혀 있어 한 구절씩 맞대볼 수 있다.

확인되지 않는 것. 태초(太初) 개력(改曆) 때 쓴 관측(觀測) 기록이다. 낙하홍(落下閎)과 등평(鄧平)이 무엇을 재고, 몇 번 재고, 얼마나 틀렸는지, 사서(史書)는 수를 남기지 않았다. 아는 것은 결과뿐이다. 그들이 81을 골랐고, 19년 7윤(閏)을 골랐고, 그 분수를 골랐다는 것. 왜 그 수여야 했는지, 『한서(漢書)』 자신이 주는 황종(黃鐘)의 설명 말고는 단서가 없다.

【일설(一說)】 분모 81을 황종(黃鐘)의 율수(律數)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수술(數術) 내부의 자기 정당화이지 천문(天文)상의 이유가 아니다. 역가(曆家)는 먼저 수술(數術) 안에서 아름다운 수를 찾고, 다음에 역법(曆法)을 그것에 맞추게 했다. 이 읽기는 통모(統母)의 배열을 설명하지만, 당사자들이 그 순서로 생각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한 겹 더 구별해 두고 싶다. 이 글이 「어긋났다」고 할 때, 그것은 오늘의 측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태초(太初) 연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 역법(曆法)이 『전욱력(顓頊曆)』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사실 그랬다. 어긋남은 백오십 년 뒤에 보인다. 뒤의 오차(誤差)를 과거로 투영해 당시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한 읽기가 아니다.

본문에 대한 주기(注記)

이것은 일반 독자를 위한 해설이며, 독자적 연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한 역법(曆法)상의 사실은 전래 문헌(傳來文獻)과 출토 자료(出土資料)에 근거한다. 이 한국어판은 중국어 원문과 같은 글을 다른 언어로 낸 것이다. 저자명은 邝楚嘉, Chujia Kuang. 필명은 嘉言一得(Jiayan Yide).

논의의 대상 자체가 말인 경우, 중국어 술어(術語)는 원자(原字)대로 남겼다.

성명(聲明)

자금(資金). 본 연구는 외부 자금을 받지 않았다.

이해상충(利害相衝). 저자에게 이해상충은 없다.

자료 이용 가능성. 본 연구에서 새 자료의 작성·분석은 하지 않았다.

언어(言語). 중국어 원문은 본 기록의 동봉 파일로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參考文獻)

[1] 史記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漢.

[2] 漢書 [Book of Han]. 漢.

[3] 後漢書 [Book of the Later Han]. 南朝宋.

[4] 資治通鑑 [Comprehensive Mirror for Aid in Government].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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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판: 《太初历》《三统历》:朔策与闰周的误差 — 본고의 중국어 원문.

사이트 허브: 화하(華夏) 고대 천문 역법(天文曆法) 실증 연구 | 술어(術語) | 역법 개혁(曆法改革) | 출판물(出版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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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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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初暦』『三統暦』——朔策と閏周の誤差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Chujia Kuang(邝楚嘉)

独立研究者、中国広東省掲陽

連絡先(Corresponding author):Chujia Kuang、独立研究者、中国広東省掲陽。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要旨

紀元前一〇四年、漢の朝廷は暦を改めた。その改暦について伝わる記録は、儀礼の面では薄く、算の面では厚い。残っているのは『漢書』律暦志の「統母」と題された一组の定数である。ここでいう「母」とは、以後のすべての数がそこから生まれる根本の数のことだ。このうち二つが、のちの成否を決める。一つはひと月の長さを定め、一つは何年の中にいくつの閏月を置くかを定める。本稿はこの二つを読み、続いて、この二つに何が起こったかの記録を読む。暦は百余年のあいだ動き、やがて史書は、朔が暦より先に来たこと、暦が朔の日と書いた日に月が見えなかったことを書き始める。元和二年(八五年)、朝廷は暦が天から丸一日ずれたことを認めた。その証拠として持ち出されたのは新しい観測ではなく、古い記録だった。史書にすでに書かれていた日食を、暦がそれを朔の日に置いたかどうかで分類したのである。本稿はその監査を追う。結論は狭い。太初の定数は内部で噛み合っており、当時得られた最良のものであった。同時に、作りからして粗かった。そしてそのことは、記録自身が記録の言葉で語っている。

キーワード: 太初暦;三統暦;朔策;閏周;十九年七閏;漢書律暦志;後漢書律暦志;賈逵;日食;中国暦法

はじめに

紀元前一〇四年、漢の朝廷は暦を改めた。史書が書き留めたのは儀礼と徳運のことである。新しい正月、新しい服色、新しい元号。どう計算したかは書いていない。

それは別の場所に残っている。表である。『漢書』律暦志は、その定数を「統母」という語の下に並べる。統母とは体系の母である。暦のなかの数は、すべてここから生まれる。七つの数が一つの段落にまとめて示され、そのうち二つが、暦の当たり外れを決める。

第一はひと月の長さ。第二は閏周、すなわち何年の中にいくつの余分な月を挿すかである。

どちらも算によって決められた。測量だけによってではない。そしてどちらも、わずかに違っていた。本稿が扱うのは、その「わずか」がどれほどで、どうやって見つかったかである。

見つけ方が面白い。哲学者が見つけたのではない。役人が二つの一覧を突き合わせて見つけた。一つは暦が「月が暗い」と書いた日の一覧、もう一つは史書が「日が食えた」と書いた日の一覧である。日食は朔にしか起こらない。だから記録された日食の一つ一つが、暦の朔を無料で試す試験になる。そして漢の史書は、二百年にわたって日食を書き留めていた。

1. 太初の改暦が換えたのは、年ではなく、物差しだった

秦と漢の初めは『顓頊暦』を用い、歳首を十月に置いた。漢はこれを受け継ぎ、改めず、武帝の代まで使い続けた。

太初元年、改めた。最初の仕事は歳首を十月から正月へ戻すことだった。これは本系列の前稿『「顓頊暦」と秦・漢初の暦法の考古学的証拠』で述べたので、繰り返さない。

第二の仕事は、あまり注意されないが、以下の議論にとってはもっと重い。この改暦は歳首を動かしただけではない。一日を何分割するかという、その刻みそのものを定義し直したのである。

漢の暦家は小数を使わない。分数を使う。一日をいくつに切るか、その数を「日法」と呼んだ。日法が決まれば、ひと月も一年も、その刻みのどこかに着地しなければならない。ひと月を二九・五三日と書くことはできない。八一分の一の整数倍としてしか書けない。

太初の改暦は、日法を八十一に定めた。

八十一は行き当たりばったりの数ではない。『漢書』律暦志はその由来を、表の最初の一行で明かしている。

日法八十一。元始黄鐘初九自乘,一龠之数,得日法。

八十一は九の二乗である。九は『易』の陽爻の数。標準の律管である黄鐘は一龠を容れ、一龠は八十一分。つまりこの分母は、天からではなく、楽律と卦爻から出ている。

ここが本稿全体の要である。暦は天に合わねばならない。しかし暦家の手にある物差しは、まず数術の物差しだった。一世紀後に現れる誤差の根は、ここにある。

2. 『太初暦』と『三統暦』——一組の数、二つの名

まず混乱を一つほどいておく。太初年間に改められた暦を『太初暦』と呼ぶ。『漢書』に収められた完全な算法を『三統暦』と呼ぶ。二つの名、一組の数である。

『後漢書』律暦志は、振り返って最初の年についてさえ後の名を使う。

自太初元年始用『三統暦』,施行百有余年,暦稍後天,朔先於暦,朔或在晦,月或朔見。

「太初元年より『三統暦』を用い始め」——後代の書き手は、その体系が後につけた名で、全体を呼んだ。この名は劉歆に結びつく。前漢末に暦を整備した劉歆は、その数に「三統」の理屈を着せた。天統・地統・人統、黒統・白統・赤統を、夏・殷・周の三代に当てる。数は変わっていない。語彙が変わっただけである。

だから漢代の資料で「太初」と「三統」が並んでいても、二つの暦ではない。違いは名にあり、算にはない。

3. 朔策——ひと月は二十九日と八十一分の四十三

『漢書』律暦志の統母は、要る数を一度に並べる。

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閏法十九,因為章歳。……章月二百三十五。……統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

七つの定数、それぞれに役目がある。月の長さに直接かかわるのは最初の二つ。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である。

日法は一日を八十一に切る。月法はひと月がその何個分かをいう。二千三百九十二個を八十一で割れば、二十九日と、八十一のうち四十三が余る。これは現代の復元ではない。漢代の読み手がそう読んだ。ひと月は二十九日半ば少し。その半日の端数を、八十一分の四十三と書く。

なぜもっと細かくしないのか。日法がすでに八十一と決まっているからである。分母が先に決まり、刻みが決まり、月はその最も近い刻みに合わせられる。

八十一分の四十三という端数は、漢代暦法の目印になり、体系の通称にもなった。八十一分法である。暦家はこの分母を誇りにした。『漢書』はそれを表の最初に置き、黄鐘から来る道理をわざわざ説明している。

4. 閏周——十九年に七つの閏月

第二の定数は閏周である。

太陰暦の十二か月は、太陽年より短い。短い分が溜まると、二、三年でひと月分になる。そこで閏月を挿す。何年の中にいくつ挿すかは、太陰太陽暦の大関節である。挿しすぎれば季節が月より先へ走り、挿さなすぎれば季節が遅れる。

漢の答えは十九年に七閏だった。統母の二項目がそれをいう。閏法十九、すなわち章歳十九。章月二百三十五。

二百三十五がどこから来るかは、漢の注が書いている。十九年、每年十二か月で二百二十八か月。これに閏月七つを加えて二百三十五。一章は十九年・二百三十五か月、その中に七つの閏がある。これが十九年七閏である。

この周期の理屈は、十九の太陽年が二百三十五の朔望月にほぼ等しい、というところにある。ほぼ等しいのであって、等しいのではない。漢代の暦家はそれを知っていた。だからこの周期を「章」と呼んだ。一章で区切りがつき、また開く。一章のうちで朔旦と冬至は同じ日に戻る。章の終わりに残る端数は消えない。次の章へ繰り越される。

『漢書』はさらに「朔望之会百三十五」を挙げ、さらに会月六千三百四十五を挙げる。まさにこの繰り越しを扱うためである。食は朔望に起こる。朔望がずれれば、予報する食もずれる。章・統・元と周期を積み上げたのは、端数を吸い尽くそうとしたからだ。

吸い尽くせなかった。それが次節の話である。

5. 誤差はいつ姿を現したか

太初暦は百余年動いた。やがて記録は、ずれた、と言い出す。

『後漢書』律暦志はまず総括して言う。

自太初元年始用『三統暦』,施行百有余年,暦稍後天,朔先於暦,朔或在晦,月或朔見。

「暦稍く天に後る」とは、天はもうその位置に着いているのに、暦がまだ着いていないこと。「朔、暦に先だつ」とは、暦がまだ前の月と言っているのに、天はもう月の暗い日になっていること。そして最も平明な一句——暦が朔と書いた日に、月が見えないことがあり、暦が月の暗い日と言った日に、細い月が掛かっていることがあった。

これは分や秒の話ではない。人が見て分かる話である。

章帝の元和二年には、開きがもっと大きくなっていた。

至元和二年,『太初』失天益遠,日、月宿度相覚浸多,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未至牽牛五度,而以為牽牛中星,後天四分日之三,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

冬至の日、太陽は斗宿二十一度にあるべきなのに、暦はまだ牽牛の中星としていた。晦朔弦望はまる一日ずれ、宿度は五度ずれた。「候者皆知る」——一人の賢い人が見つけたのではなく、実際に見ていた者たちの共通の知識になっていた。

そこで章帝は詔を下した。その一句が病根を正確に指す。

史官用太初鄧平術,有餘分一,在三百年之域,行度轉差,浸以謬錯。

「余分一有り」——この体系には割り切れない端数が一つある。端数は小さい。しかし「三百年の域」のうちに、運行の度が次第にずれ、誤りが浸み込んでくる。詔はさらに讖緯の一句を引く。「三百年斗暦改憲」——三百年で斗の暦は改まる。この句は予言として読まれ、事後の注釈として働く。

改暦は四分暦を採った。しかし議論は終わらなかった。編訢と李梵は、元首の十一月を先ず大の月とすべきだと主張した。弦望を決まった日に合わせたいからである。反対した者たちが指したのは、閏周そのものの綻びだった。

而訢、梵猶以為元首十一月當先大,欲以合耦弦望,命有常日,而十九歳不得七閏,晦朔失実。

「十九歳にして七閏を得ず」——十九年七閏という周期が、もう閉じない。周期が破れれば晦朔も破れる。争いは章帝の裁定で決着した。天元始起の月を常に小の月とする、と。

6. 日食に突き合わせる

改暦論争のなかで最も硬い資料は、賈逵の統計である。

賈逵は『太初暦』が算り出した朔を、史書に記された日食に突き合わせた。日食は朔にしか起こらない。だから記録された日食は、そのまま朔策の試験になる。彼は三期に分けて数えた。

以『太初暦』考漢元尽太初元年日食二十三事,其十七得朔,四得晦,二得二日;……以『太初暦』考太初元年尽更始二年二十四事,十得晦;……以『太初暦』考建武元年尽永元元年二十三事,五得朔,十八得晦。

第一期、漢の元年から太初元年まで、二十三件のうち十七件が朔に当たった。第二期、太初元年から更始二年まで、二十四件のうち十件が晦に落ちた。第三期、建武元年から永元元年まで、二十三件のうち朔に当たったのはわずか五件、十八件が晦に落ちた。

三期を並べれば、傾向は疑いようがない。同じ暦、同じ物差しで、初めは合い、後になると合わなくなる。

この方法自体に一言いる。賈逵は「何刻ずれたか」を問うていない。「朔の日に落ちたかどうか」だけを問うた。それが漢代に実際にできた試験だった。分単位で精しい記録はないが、「某年某月某日、日食あり」という一行なら二百年分ある。その一行を暦に突き合わせれば、合うか合わないか、ごまかしは効かない。

ついでに言えば、賈逵は新たに立てた四分暦でも同じ日食を数え、その結果を別に記している。改暦論争の実際のやり方はこれである。どちらの理屈が美しいかではなく、どちらが多く当たるかを数えた。

7. なぜ八十一分法はずれたか

根に戻る。

八十一分法の欠点は、八十一という数が間違っていることではない。八十一が粗すぎることである。一日を八十一に切れば、一切れはかなりの長さになる。ひと月はそのどれかに着地しなければならず、最も近い切れ目が、天の月そのものであるとは限らない。

現在の朔望月の値は、二つの刻みのあいだにある。八十一分法は近いほうを採り、二十九日と八十一分の四十三とした。刻み一つ分は小さく見える。しかしひと月の小さな誤差は一年で十二になり、一年に十二の小さな誤差が百五十年積もれば、暦は丸一日動く。『後漢書』が「朔、暦に先だつ」「朔、或いは晦に在り」と書いたのは、まさにこれである。

閏周も同じ理屈で破れる。十九年七閏は、十九の太陽年と二百三十五の朔望月を等しいと置く。近いのであって、等しくはない。差は年ごとに積もり、記録の言葉を借りれば「十九歳にして七閏を得ず」、周期は閉じなくなる。

二つのずれは方向が違う。月の長さのずれは朔望の日を徐々に動かす。閏周のずれは季節と月を徐々に引き離す。二つが同時にずれれば、年・月・日が三つとも食い違う。

これを改めた四分暦は、日法を四にし、ひと月を二十九日と九百四十分の四百九十九とした。分母が大きくなれば刻みが細かくなり、着地点は近づく。しかしこれは分数で月を追う道を替えてはいない。この道は唐代に一行が不等間隔の二次差算法を導入するまで続いた。

8. どこまでが確かめられ、どこからが推論か

いつものように両面から。

確かめられるもの。統母の七つの定数は『漢書』律暦志に白黒つけて書いてある。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閏法十九、章月二百三十五、統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この七つは互いに噛み合っており、後から挿し込まれたものではない。改暦の年、詔の理由、編訢・李梵の争い、賈逵の三期の統計も、『後漢書』律暦志に記されており、一句ずつ突き合わせられる。

確かめられないもの。太初の改暦のときに使われた観測の記録である。落下閎や鄧平が何を測り、何回測り、どれだけ誤ったか、史書は数字を残していない。分かっているのは結果だけである。彼らが八十一を選び、十九年七閏を選び、あの分数を選んだ、ということ。なぜその数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漢書』自身が与える黄鐘の説明以外に、手がかりはない。

【一説】分母八十一を黄鐘の律数から取ったというのは、数術の内部での自己正当化であって、天文上の理由ではない。暦家はまず数術のなかで美しい数を見つけ、次に暦をそれに合わせさせた。この読みは統母の並びを説明するが、当の本人たちがその順で考えたという直接の証拠はない。

もう一层、区別しておきたい。本稿が「ずれた」というとき、それは今日の測定を基準にしている。太初年間の人々はそう思っていない。彼らは新しい暦が『顓頊暦』よりはるかに良いと思っていた。事実そうだった。ずれは百五十年の後に見えてくる。後の誤差を過去に投影して、当時の人が間違えたというのは、公正な読みではない。

本文についての注記

これは一般向けの解説であり、独自の研究を主張するものではない。引用した暦法上の事実は、伝世文献と出土資料に拠っている。この日本語版は、中国語原文と同一の文章を別の言語で出したものである。著者名は邝楚嘉、Chujia Kuang。筆名は嘉言一得(Jiayan Yide)。

議論の対象そのものが語である場合、中国語の術語は原字のまま残した。

声明

資金。 本研究は外部資金を受けていない。

利益相反。 著者に利益相反はない。

データの利用可能性。 本研究で新たなデータの作成・解析は行っていない。

言語。 中国語原文は本記録の同梱ファイルとして保存されている。

参考文献

[1] 史記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漢.

[2] 漢書 [Book of Han]. 漢.

[3] 後漢書 [Book of the Later Han]. 南朝宋.

[4] 資治通鑑 [Comprehensive Mirror for Aid in Government].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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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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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初曆》《三統曆》:朔策與閏周的誤差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漢武帝太初元年,公元前一〇四年,漢朝換了一部曆法。

換曆這件事,史書記下來的是禮儀與德運:改正朔、易服色、封禪、改元。曆法本身怎麼算,紙面上剩下的只有一串數。這串數收在《漢書·律曆志》裡,標題叫「統母」——「母」是立法的根本,後面的推算都從這個母數生出來。

統母裡有兩個數最要緊:一個管一個月有多長,一個管幾年插幾個閏月。前者古人叫朔策,後者叫閏周。這兩個數只要偏一點,日子就會一年一年地錯開,錯到最後,曆書上寫著初一,天上卻是晦日。

這篇文章講的就是這兩個數:它們怎麼定的,偏在哪裡,什麼時候被人發現。

一、太初改曆,換的不是一年,是一把尺

秦與漢初用《顓頊曆》,以十月為歲首。漢朝接手,沒有改,一路用到漢武帝。

到太初元年,改了。改的第一件事是歲首:從十月挪回正月。這件事在《史記》《漢書》裡都記著,前一篇《「顓頊曆」與秦至漢初曆法的考古證據》已經談過,這裡不重複。

要補的是第二件事,也是更容易被忽略的一件:這次改曆不只挪了歲首,還把「一日切成幾份」這件事重新定了。

古人算曆,不用小數,用分數。一日切成多少份,叫日法。日法一定,一個月、一年都只能落在這些份數的格子上。太初改曆把日法定在八十一。

八十一這個數不是隨手寫的。《漢書·律曆志》開篇講統母,第一句就交代了它的來路:

日法八十一。元始黃鐘初九自乘,一龠之數,得日法。

黃鐘是律管之名,初九是《易》的陽爻之數,九自乘得八十一。一根律管的容積,一龠,也正好是八十一分。所以八十一在漢代是「數出有故」的數:它從樂律與卦爻裡來,不是從天上量出來的。

這一點很要緊。曆法要合天,可制曆的人手裡握著的尺子,先是一把數術的尺子。後面的偏差,根子在這裡。

二、《太初曆》與《三統曆》:一套數,兩個名

這裡有個容易繞暈的地方:太初年間改的那部曆,叫《太初曆》;後來收進《漢書》的那套完整算法,叫《三統曆》。兩個名,一套數。

《後漢書·律曆志》追述這段,用的是後一個名:

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施行百有餘年,曆稍後天,朔先於曆,朔或在晦,月或朔見。

「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後人把太初元年起的這整套系統,直接稱作《三統曆》。這個稱呼與劉歆有關。劉歆在西漢末年整理曆法,替這套數配了一整套「三統」的說法:天統、地統、人統,黑統、白統、赤統,一一對應到夏、殷、週三代。數還是那些數,說法換了。

所以讀漢代曆法,看到「太初」與「三統」並列,不必當成兩部曆。它們的分量差別在名號,不在數字。

三、朔策:一個月是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

《漢書·律曆志》的統母,把要用的數一次列齊:

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閏法十九,因為章歲。……章月二百三十五。……統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萬二千一百二十。……朔望之會百三十五。

七組數,各有各的用處。與月長直接相關的是前兩個: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

日法是把一日切成八十一份,月法是一個月佔多少份。二千三百九十二份,攤到八十一片一日裡頭,就是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日。這一步不是我在算,漢代人自己就這麼讀:一個月二十九天半多一點,剩下那半天的零頭,記成八十一分之四十三。

為什麼不再細分?因為日法就定在八十一。分母定了,格子就定了。天上的朔望月不會照著人的分母走,人只能把最近的格子認作它。

八十一分之四十三這個零頭,後來成了漢代曆法的一個標誌,連名字都由此而來:八十一分法。制曆的人對自己的這個分母很得意,《漢書》把它擺在統母第一條,還專門解釋了它從黃鐘來的道理。

四、閏周:十九年七個閏月

第二個數是閏周。

陰曆十二個月,比一個回歸年短。短出來的日子攢上兩三年,就夠一個月,於是要插一個閏月。幾年插幾個,是曆法的大關節:插多了,季節往前趕;插少了,季節往後拖。

漢代的辦法是十九年七個閏月。統母裡兩條記載說的就是這件事:閏法十九,章歲十九;章月二百三十五。

二百三十五這個數怎麼來的,古人寫在《漢書》的注裡,也寫在《後漢書》的注裡:十九年,每年十二個月,得二百二十八個月;再加七個閏月,正好二百三十五。一章十九年、二百三十五個月,一章之內七個閏月——這就是十九年七閏。

這套辦法的道理是:十九個回歸年的長度,與二百三十五個朔望月的長度,差不多相等。差不多,不是相等。古人知道這一點,所以叫它「章」,一章之後朔旦與冬至又回到同一天,可這隻在同一章之內成立;章與章之間的餘數,還得往下攢。

《漢書·律曆志》在統母之外還記了「朔望之會百三十五」,記了「會月六千三百四十五」,都是為了處理這個「攢下來的餘數」——日食月食要在朔望上發生,朔望對不上,交食的日子就對不上。一層一層往上加週期,加到「統」、加到「元」,本意都是想把餘數收乾淨。

收不乾淨。這是後話。

五、誤差什麼時候顯形

太初曆行了一百多年,問題出來了。

《後漢書·律曆志》把這段寫得很清楚,先總說一句:

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施行百有餘年,曆稍後天,朔先於曆,朔或在晦,月或朔見。

「曆稍後天」是曆法走得慢了:天上已經到了那個位置,曆書上還沒到。「朔先於曆」是朔日搶在曆書前面:曆書上寫著還沒到初一,天上已經是看不見月亮的晦日。最後一句最直白:朔或在晦,月或朔見——該是初一的那天,天黑得看不見月亮;該看不見月亮的那天,一彎新月已經掛上來了。

這不是算出的小差,是看得見的小差。

到東漢章帝元和二年,差得更多:

至元和二年,《太初》失天益遠,日、月宿度相覺浸多,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未至牽牛五度,而以為牽牛中星,後天四分日之三,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

冬至那天太陽該在斗宿二十一度,曆書卻還寫著牽牛中星。晦朔弦望差了一整日,宿度差了五度。差到「候者皆知」——不是一兩個人算出來,是觀候的人都知道。

章帝於是下詔改曆。詔書裡有一句,把病根點得很準:

史官用太初鄧平術,有餘分一,在三百年之域,行度轉差,浸以謬錯。

「有餘分一」——這套數里帶著一個除不盡的餘數。餘數不大,一年看不出來;「在三百年之域」,攢到三百年就顯出來了。詔書還引了一句讖緯:「三百年斗曆改憲」。這句話既是預言,也是事後的註解。

改曆的結果是行《四分曆》。但改完還有爭論。編訢、李梵主張「元首十一月當先大」,理由是要讓弦望落在固定的日子上。反對的人指出的正是閏週上的毛病:

而訢、梵猶以為元首十一月當先大,欲以合耦弦望,命有常日,而十九歲不得七閏,晦朔失實。

「十九歲不得七閏」——十九年七個閏月這個周,到這時候已經配不上了。閏週一亂,晦朔就失實。爭到最後,章帝裁定「天元始起之月常小」,把起點那個月定為小月。

六、拿日食來對表

改曆之爭裡,最硬的一份材料是賈逵的統計。

賈逵把《太初曆》算出來的朔,拿去對史書記載的日食。日食必在朔,所以日食落在哪一天,是檢驗朔策的一把現成的尺子。他分三段數:

以《太初曆》考漢元盡太初元年日食二十三事,其十七得朔,四得晦,二得二日;……以《太初曆》考太初元年盡更始二年二十四事,十得晦;……以《太初曆》考建武元年盡永元元年二十三事,五得朔,十八得晦。

第一段,漢元年到太初元年,二十三事裡頭,十七件事對上了朔。第二段,太初元年到更始二年,二十四件事,十件落在晦。第三段,建武元年到永元元年,二十三件事,只有五件得朔,十八件得晦。

三段擺在一起,趨勢一目瞭然:越往後,對上的越少。同一個曆法,同一把尺子,前期還算合手,後期就一路偏下去了。

這份統計的方法本身也值得一說。它不去比「差了幾刻幾分」,只比「落沒落在朔這一天」。這是漢代人能做的檢驗:他們沒有精到分鐘的記錄,有的是史書裡「某年某月某日食」這一行字。把這一行字拿來與曆書對,對不上就是對不上,賴不掉。

順帶說一句,賈逵同時用新立的《四分曆》對同一批日食,結果另記一份。這就是改曆之爭的實際打法:不比誰的道理好聽,比誰對上的多。

七、為什麼八十一分法會偏

回到根子上。

八十一分法的問題,不在於八十一這個數算錯了,而在於它太粗。一日切成八十一份,一份就是一日之八十一分之一。一個月只能落在這些格子的某一個上,最近的格子,未必就是天上那個月。

今測一個朔望月,約二十九日半多一點,落在兩格之間。八十一分法取的二十九日又八十一分之四十三,是靠近它的一格。一格之差看著小,可一個月差一點,十二個月就差一截;差上一百多年,曆書上的一天就整個挪了位。《後漢書》說的「朔先於曆」「朔或在晦」,就是這麼來的。

閏周也是一樣。十九年七閏,是把十九個回歸年與二百三十五個朔望月當作一樣長。實際上兩者不一般長,差數一年一年攢。攢到「十九歲不得七閏」,這個周就維持不住了。

這兩處偏,方向還不一樣:月長偏一點,朔望的日子就慢慢挪;閏周偏一點,季節與月份就慢慢脫開。兩處一起偏,曆書上的年月日就三頭不對。

改行《四分曆》,日法改成四,一個月是二十九日又九百四十分之四百九十九——分母換大了,格子密了,落點就準一些。但這也只是把格子做細,沒有把「用分數去追天上那個月」這條路換掉。這條路一直走到唐代,一行才改用不等間距的二次差算法。

八、哪一部分能核,哪一部分只是推

分兩面說。

能核的:統母那七組數,白紙黑字寫在《漢書·律曆志》裡,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閏法十九、章月二百三十五、統法一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萬二千一百二十、朔望之會百三十五。這七個數彼此咬合,不是後人補的。改曆的年份、下詔的理由、編訢李梵的爭論、賈逵的三段統計,也都記在《後漢書·律曆志》裡,可以逐句對。

不能核的:太初改曆當時用的觀測記錄。落下閎、鄧平他們量了什麼、量了多少次、誤差多少,史書沒有留下數據。今天知道的只是結果——他們選了八十一,選了十九年七閏,選了那些分數。為什麼是這個數不是那個數,除了《漢書》給的「黃鐘」一說,沒有別的憑據。

【一說】八十一這個分母取自黃鐘律數,是數術上的自證,不是天文上的理由。制曆的人先在數術裡找好一個漂亮的數,再讓曆法去遷就它。這個說法能解釋統母的排列,但沒有直接證據說明當時的人就是這麼想的。

還有一層要分清:這篇文章說「偏」,說的是以今天的測量為準。漢代人自己在太初年間並不覺得偏,他們覺得這部曆比《顓頊曆》準得多——事實也是如此。偏差是一百多年後才顯形的,不是曆法一頒行就錯。把後人看到的偏差倒推回去,說當時的人算錯了,這不公平。

A&Q

問:《太初曆》和《三統曆》是兩部曆法嗎?

答:通常當作一套數的兩個名。太初元年(前 104)改曆行用的叫《太初曆》;西漢末年劉歆把這套數配上「三統」的說法整理成完整系統,收在《漢書·律曆志》裡,後世稱《三統曆》。《後漢書·律曆志》追述時直接寫「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把兩個名併成了一件事。

問:八十一分法為什麼叫這個名字?

答:因為它把一日切成八十一份,一個月的零頭記成八十一分之四十三。《漢書·律曆志》統母第一條就是「日法八十一」,並解釋這個數來自黃鐘初九自乘、一龠之數。

問:十九年七閏是怎麼定的?

答:十九個回歸年的長度,與二百三十五個朔望月的長度大致相等。一章十九年、二百三十五個月,其中十二個月一年、共二百二十八個月,餘下七個月作閏月。這就是十九年七閏。它是近似,不是恆等。

問:誤差是怎麼發現的?

答:先由觀候發現。《後漢書·律曆志》記「曆稍後天,朔先於曆,朔或在晦,月或朔見」——曆書上寫的初一,天上已經是晦日。到元和二年,「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候者皆知。再用日食對表:賈逵把《太初曆》算的朔拿去對史書記載的日食,前期二十三事對上十七,後期二十三事只對上五。

問:既然偏了,為什麼還用了百餘年?

答:因為它比前一部準。《太初曆》取代《顓頊曆》,是因為《顓頊曆》「疏闊中最為微近」而積久更疏;《太初曆》的八十一分法在當時是更密的格子。偏差是百餘年攢出來的,不是一頒行就錯。

問:《四分曆》改了什麼?

答:日法從八十一改成四,一個月的零頭改記成九百四十分之四百九十九。分母變大,格子變密,落點更貼天上的月。但它仍然是用分數去追月,這條路要到唐代一行改用二次差算法才換掉。


鄺楚嘉按:這一篇講的兩個數,看著是技術細節,其實是漢代人做學問的樣子。他們先用律數定分母,再用分數去貼天;分母一定,格子就定了,天上那個月只要落在兩格之間,就註定要偏。可貴的地方在於,他們沒有把偏賴掉。《後漢書》把那句「朔或在晦,月或朔見」照實寫下來,賈逵把二十三件事裡只對上五件的賬也照實記下來。一部曆法行了一百多年,最後是它自己的記錄把它推下臺的。讀古代曆志,最值得留意的往往不是那些漂亮的數,而是這些照實寫下的對不上。


引用與出處

[1] 史記[M]. 漢.
[2] 漢書[M]. 漢.
[3] 後漢書[M]. 南朝宋.
[4] 資治通鑑[M].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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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ichu》 and 《Santong》 Calendars: Errors in the Synodic Month and the Intercalation Cycle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Chujia Kuang (邝楚嘉)

Independent Researcher, Jieyang, Guangdong, China

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Independent Researcher, Jieyang, Guangdong, China.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Abstract

In the first year of Taichu (104 BCE) the Han court replaced its calendar. The transmitted record of that reform is thin on ritual and rich on arithmetic: what survives is a table of constants in the Book of Han, under the heading 「统母」, the “mothers” from which every later figure was derived. Two of those constants govern everything that follows. One fixes the length of the month; the other fixes how many intercalary months fall in how many years. This essay reads both, and then reads the record of what happened to them. For a hundred and some years the calendar ran; then the histories begin to say that the new moon was arriving before the calendar said it would, that the first day of the month was being written on a day when no moon could be seen. At Yuanhe 2 (85 CE) the court conceded that the calendar had drifted a full day from the sky. The evidence it used was not a new observation but an old one: the solar eclipses already recorded in the histories, sorted by whether the calendar had put them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The essay follows that audit. Its conclusion is narrow. The constants of the Taichu reform were internally consistent and were the best available at the time; they were also, by construction, too coarse, and the record says so in its own words.

Keywords: Taichu calendar; 太初历; Santong calendar; 三统历; synodic month; 朔策; intercalation cycle; 闰周; 19-year cycle; Book of Han; 汉书·律历志; Book of the Later Han; 后汉书·律历志; Jia Kui; 贾逵; solar eclipse; Chinese calendrics

Introduction

In 104 BCE the Han court changed its calendar. The histories record the change as a matter of ritual and of dynastic colour: a new first month, new robes, a new reign title. What they do not record is how the calendar was computed.

That part survives elsewhere, in a table. The Book of Han, in its treatise on harmonics and the calendar, lists the constants under the word 「统母」 — the mothers of the system. Every later quantity in the calendar was generated from them. Seven of them are given in a single passage, and two of those seven decide whether the calendar will hold.

The first is the length of the month. The second is the intercalation cycle — how many extra months are inserted in how many years.

Both were fixed by decree of arithmetic, not by measurement alone. Both were, in the event, slightly wrong. This essay is about how slightly, and about how the wrongness was found out.

The finding out is the interesting part. It was not done by a philosopher. It was done by clerks comparing two lists: the dates on which the calendar said the moon would be dark, and the dates on which the histories said the sun had been eclipsed. An eclipse can only happen at new moon. So every recorded eclipse is a free test of the calendar’s new moon, and the histories of the Han had been recording eclipses for two centuries.

1. The reform of Taichu changed a ruler, not just a year

Qin and the early Han had used the Zhuanxu calendar, with the year beginning in the tenth month. The Han inherited it and did not change it, down to the reign of Emperor Wu.

At Taichu 1 the court changed it. The first act was to move the beginning of the year back to the first month. That has been described in an earlier essay in this series, on the Zhuanxu calendar and its archaeological evidence, and is not repeated here.

The second act is less often noticed, and it matters more for what follows. The reform did not only move the start of the year. It redefined the grain into which a day was divided.

The calendar-makers of the Han did not work in decimals. They worked in fractions. The number of parts into which one day was cut was called the 「日法」, the day-divisor. Once that divisor is fixed, every month and every year must land on one of those parts. A month cannot be 29.53 days; it can only be some whole number of eighty-firsts of a day.

The Taichu reform set the day-divisor at eighty-one.

Eighty-one was not an arbitrary choice, and the Book of Han says where it came from in the first line of the table:

日法八十一。元始黄钟初九自乘,一龠之数,得日法。

Eighty-one is nine multiplied by nine. Nine is the yang line of the Changes; the standard pitch-pipe, the Yellow Bell, holds one yue, and one yue is eighty-one parts. So the divisor was derived from music theory and from divination, not from the sky.

This is the point that governs the rest of the essay. A calendar must agree with heaven, but the ruler in the calendar-maker’s hand was first a numerical and cosmological ruler. The error that appears a century later has its root here.

2. 《Taichu》 and 《Santong》: one set of numbers, two names

There is a confusion worth clearing up at the start. The calendar introduced in the Taichu era is called the Taichu calendar. The complete algorithm preserved in the Book of Han is called the Santong calendar, the calendar of the Three Sequences. Two names, one set of numbers.

The Book of the Later Han, looking back, uses the second name even for the first year:

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施行百有余年,历稍后天,朔先于历,朔或在晦,月或朔见。

“From the first year of Taichu the Santong calendar was in use.” Later writers simply called the whole system by the name it acquired. The name is associated with Liu Xin, who at the end of the Western Han reorganised the calendar and dressed its numbers in a scheme of three sequences — heaven, earth, and man; black, white, and red — mapped onto the three dynasties of Xia, Shang, and Zhou. The numbers were unchanged. The vocabulary was new.

So when a Han source sets 「太初」 and 「三统」 side by side, they are not two calendars. The difference is in the name, not in the arithmetic.

3. The synodic month: twenty-nine days and forty-three eighty-firsts

The table of constants in the Book of Han gives everything at once:

日法八十一。……月法二千三百九十二。……闰法十九,因为章岁。……章月二百三十五。……统法千五百三十九。……周天五十六万二千一百二十。……朔望之会百三十五。

Seven constants, each with a use. The first two govern the length of the month: the day-divisor is eighty-one, and the month-factor is two thousand three hundred and ninety-two.

The day-divisor cuts the day into eighty-one parts. The month-factor says how many such parts a month contains: two thousand three hundred and ninety-two. Read against the divisor, that is twenty-nine whole days and forty-three of the eighty-one parts left over. This is not a modern reconstruction; it is how Han readers read the table. A month runs a little over twenty-nine and a half days, and the half-day’s remainder is written as forty-three eighty-firsts.

Why not divide further? Because the divisor had already been fixed at eighty-one. The denominator is chosen first; the grid is then fixed; and the moon is required to fall on the nearest grid line.

That remainder of forty-three eighty-firsts became the signature of Han calendrics, and gave the system its common name: the eighty-one-part method. The calendar-makers were proud of their denominator. The Book of Han puts it first in the table and explains, at length, why it descends from the Yellow Bell.

4. The intercalation cycle: seven months in nineteen years

The second constant is the intercalation cycle.

Twelve lunar months are shorter than a solar year. The shortfall accumulates; every two or three years it amounts to a whole month, and a month must then be inserted. How many insertions in how many years is the great joint of any lunisolar calendar: too many and the seasons run ahead of the months, too few and they fall behind.

The Han solution was seven intercalary months in nineteen years. Two entries in the table state it: the intercalation divisor is nineteen, which is also the length of a zhang; and the months in a zhang number two hundred and thirty-five.

Where two hundred and thirty-five comes from is spelled out in the Han commentaries: nineteen years of twelve months gives two hundred and twenty-eight; add seven intercalary months and the total is two hundred and thirty-five. One zhang is nineteen years and two hundred and thirty-five months, containing seven intercalations.

The reasoning behind the cycle is that nineteen tropical years are approximately equal to two hundred and thirty-five synodic months. Approximately, not exactly. The Han astronomers knew this, which is why they called the period a zhang — a chapter, a unit that closes and then reopens. Within one chapter the new moon and the winter solstice return to the same day. The remainder left over at the end of the chapter does not vanish; it accumulates into the next.

The Book of Han also lists a further constant, 「朔望之会百三十五」, and a further period, the hui-month of six thousand three hundred and forty-five, precisely in order to handle that accumulating remainder. Eclipses occur at new and full moon; if the new moons are off, the predicted eclipses are off. The periods were stacked — zhang, tong, yuan — in the hope of absorbing the remainder entirely.

They were not absorbed. That is the subject of the next section.

5. When the error became visible

The Taichu calendar ran for something over a century. Then the record says it had drifted.

The Book of the Later Han states the matter first in summary:

自太初元年始用《三统历》,施行百有余年,历稍后天,朔先于历,朔或在晦,月或朔见。

The calendar was “slightly behind heaven”: the sky had reached a position the calendar had not yet reached. The new moon “came before the calendar”: the calendar still showed the old month while the sky had already turned to the dark of the moon. And then the plainest sentence in the passage: the first day of the month was sometimes written on a day of true darkness, and a crescent was sometimes visible on the day the calendar called the dark of the moon.

These are not minute quantities. They are things a person can see.

By Yuanhe 2, under Emperor Zhang, the gap had grown:

至元和二年,《太初》失天益远,日、月宿度相觉浸多,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未至牵牛五度,而以为牵牛中星,后天四分日之三,晦朔弦望差天一日,宿差五度。

At the winter solstice the sun should have been in the twenty-first degree of the Dipper; the calendar still had it at the determinative star of the Ox. New moon, first quarter, full moon, last quarter — the calendar was a full day out, and the lunar lodges five degrees out. And “the observers all knew it”: this was not the discovery of one clever man but the common knowledge of the men who did the watching.

The emperor issued an edict. One sentence in it names the fault precisely:

史官用太初邓平术,有余分一,在三百年之域,行度转差,浸以谬错。

The system of Deng Ping, used by the astronomers, “carries a remainder of one”; the remainder is small, and within the span of three hundred years it turns into a drift. The edict also quotes a prognostic text: 「三百年斗历改宪」 — in three hundred years the calendar of the Dipper is reformed. The line reads as prophecy and functions as retrospection.

The reform that followed adopted the Quarter-Day calendar. But the argument did not end. Bian Xin and Li Fan proposed that the first month of the reckoning should begin with a long month, so that the quarters would fall on fixed days. Their opponents pointed at the intercalation cycle itself:

而訢、梵犹以为元首十一月当先大,欲以合耦弦望,命有常日,而十九岁不得七闰,晦朔失实。

“Nineteen years no longer yields seven intercalations.” The cycle itself had stopped closing. Once the cycle fails, the new moons fail with it. The dispute was settled by imperial ruling: the initial month of the epoch was to be a short month.

6. Checking the calendar against eclipses

The hardest document in the dispute is an audit by Jia Kui.

Jia Kui took the new moons computed by the Taichu calendar and set them against the solar eclipses recorded in the histories. An eclipse can occur only at new moon. Every recorded eclipse is therefore a ready-made test of the calendar’s new moon. He counted in three blocks:

以《太初历》考汉元尽太初元年日食二十三事,其十七得朔,四得晦,二得二日;……以《太初历》考太初元年尽更始二年二十四事,十得晦;……以《太初历》考建武元年尽永元元年二十三事,五得朔,十八得晦。

In the first block, from the first year of Han to Taichu 1, twenty-three eclipses: seventeen fell on the computed new moon. In the second, from Taichu 1 to Gengshi 2, twenty-four eclipses: ten fell on the dark of the moon — that is, a day late. In the third, from Jianwu 1 to Yongyuan 1, twenty-three eclipses: only five fell on the new moon, eighteen on the dark.

Set the three blocks side by side and the trend is not in doubt. The same calendar, tested by the same rule, agrees with the sky in its early years and disagrees in its later ones.

The method deserves a word of its own. Jia Kui did not ask how many quarter-hours the calendar was out. He asked only whether the eclipse fell on the computed first day of the month. That was the test the Han could actually run: they had no records precise to the minute, but they had two centuries of entries reading “in such a year, such a month, on such a day, the sun was eclipsed.” Set that line against the calendar, and either it matches or it does not.

It is worth adding that Jia Kui ran the same test with the newly adopted Quarter-Day calendar and reported those results separately. That is how the argument was actually conducted: not by comparing the elegance of the theories, but by counting which one matched more often.

7. Why the eighty-one-part method drifted

Back to the root.

The fault of the eighty-one-part method is not that eighty-one is the wrong number. It is that eighty-one is too coarse. Cut a day into eighty-one parts and each part is a substantial interval. A month must fall on one of those parts, and the nearest part need not be the moon’s actual position.

The modern value for the synodic month falls between two of the grid lines. The eighty-one-part method takes the nearer one, twenty-nine days and forty-three eighty-firsts. A single grid-step looks small. But a small error in one month is twelve small errors in a year, and twelve small errors a year for a century and a half moves the calendar by a whole day. That is exactly what the Book of the Later Han describes when it says the new moon came before the calendar, and that the first of the month was sometimes written on a day of true darkness.

The intercalation cycle fails for the same kind of reason. Seven months in nineteen years treats nineteen tropical years and two hundred and thirty-five synodic months as equal. They are close, not equal. The difference accumulates year by year until, as the record puts it, nineteen years no longer yields seven intercalations and the cycle will not close.

The two faults run in different directions. A slight error in the month length shifts the new moons gradually. A slight error in the cycle gradually detaches the seasons from the months. Together they throw the year, the month, and the day out of joint at once.

The Quarter-Day calendar that replaced it cut the day into four parts and wrote the month as twenty-nine days and four hundred and ninety-nine nine-hundred-and-fortieths. A larger denominator means a finer grid and a closer fit. But it is still a fraction chasing the moon. That approach lasted until the Tang, when Yixing introduced an algorithm of second differences for unequal intervals.

8. What can be checked, and what is only inference

Two sides, as usual.

What can be checked: the seven constants of the table, written out in the Book of Han — day-divisor eighty-one, month-factor two thousand three hundred and ninety-two, intercalation divisor nineteen, months in a zhang two hundred and thirty-five, tong divisor one thousand five hundred and thirty-nine, circuit of heaven five hundred and sixty-two thousand one hundred and twenty, and the syzygy meeting of one hundred and thirty-five. The seven interlock; they are not a later insertion. The year of the reform, the wording of the edict, the dispute of Bian Xin and Li Fan, and the three blocks of Jia Kui’s eclipse count are all in the Book of the Later Han and can be checked line by line.

What cannot be checked: the observations made at the time of the reform. What Luo Xiahong and Deng Ping measured, how often, and with what error, the histories do not record. What is known is the outcome — that they chose eighty-one, chose seven in nineteen, chose those fractions. Why those numbers rather than others, apart from the Yellow Bell explanation the Book of Han itself gives, there is no evidence.

【One reading】 That the divisor eighty-one was taken from the pitch-pipes is a self-justification internal to numerology, not an astronomical reason. The calendar-makers first found a handsome number in the numerical arts, and then required the calendar to accommodate it. This reading explains the arrangement of the table, but there is no direct evidence that anyone reasoned in that order.

One further distinction should be kept. When this essay says the calendar was “off”, it means off by present-day measurement. In the Taichu years nobody thought so. They thought the new calendar was far better than the Zhuanxu calendar it replaced, and they were right. The drift became visible only after a century and a half. To project the later error backwards and say that the men who made the calendar got it wrong is not a fair reading of what they did.

Note on the text

This is a popular exposition, and it makes no claim to original research. The calendrical facts cited rest on transmitted texts and on excavated material. This English version is issued alongside the Chinese original as the same article in another language. The author’s name is 邝楚嘉, Chujia Kuang; he writes under the pen-name 嘉言一得 (Jiayan Yide).

Chinese terms are left in their original characters where the word itself is the subject of the discussion.

Declarations

Funding. This research received no external funding.

Competing interests. The author declares no competing interests.

Data availability. No new data were created or analysed in this study.

Language. The original Chinese text is deposited as a companion file to this record.

References

[1] 史记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汉.

[2] 汉书 [Book of Han]. 汉.

[3] 后汉书 [Book of the Later Han]. 南朝宋.

[4] 资治通鉴 [Comprehensive Mirror for Aid in Government].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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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editions: 《太初历》《三统历》:朔策与闰周的误差 — the Chinese original of this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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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者:嘉言一得(邝楚嘉)|独立研究者,致力于可核验的原始文献与历法数据归档。
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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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星走一圈不是十二年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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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文曆法基礎 · 第十四篇

文/鄺楚嘉

《史記·天官書》裡有一句話,寫得毫不含糊:歲星「十二歲而周天」。

這句話寫在兩千年前,此後一千多年,歷代治曆的人都拿它當準繩。可它不對。

一、這顆星為什麼叫「歲星」

五大行星裡,木星的腳步不快不慢。水星一年繞太陽四圈多,金星一年多,火星將近兩年;木星要十一年多,土星要二十九年多。

木星這個節奏,正好可以當鍾用。

古人把周天從西向東等分成十二份,叫十二次。木星差不多一年走一份,走到哪一份,就記「歲在某次」。這顆星因此得名歲星。

十二次的名字,與二十八宿對得上:

次 二十八宿 次 二十八宿
星紀 斗、牛 鶉首 井、鬼
玄枵 女、虛、危 鶉火 柳、星、張
娵訾 室、壁 鶉尾 翼、軫
降婁 奎、婁 壽星 角、亢
大梁 胃、昴、畢 大火 氐、房、心
實沈 觜、參 析木 尾、箕

十二次與二十八宿:周天等分成十二份,每份對應一到三宿

《史記·天官書》給歲星定的一年行程是「歲行三十度十六分度之七」。

三十度又十六分之七,乘十二,得三百六十五度又四分之一。這正好是古人心目中的周天度數。

所以在古人自己的算法裡,「十二歲而周天」是圓得上的,前後不打架。

二、可木星並不照這個走

古人把周天切成三百六十五度又四分之一,是為了遷就太陽——太陽一天走一度,一年走完周天。木星不在這個刻度上。

現代測得的木星繞日一週是 11.862 年,約 4332.6 天。折算到十二次裡,木星每過一年走 1.012 次。

比一次多出 0.012 次。

這個零頭,單看一年小到測不出來。可它年年攢著。

三、攢夠八十年,就露餡了

攢到八十年上下,多出的零頭湊滿一整次。這一年,歲星本該走到下一個星次,卻提前越了過去。

古人給這個現象取了名字:超辰。多邁的那一步,叫「超一辰」。

超一次要多少年,取決於拿哪個週期值去算:

取法 超一次需
按現代的 11.862 年 85.9 年
按通行的 11.86 年 84.7 年
按本庫自算的 11.85657 年 82.7 年

超辰:每年多走 0.012 次,攢到 85.9 年就多走一整次

三個數都在八十年上下,差別只在取哪一個週期。取哪個都不算出格。古人不認識 11.86 這個數,可他們從典籍的比對裡察覺到了不對。

敦煌星图,唐写本
图 1 敦煌星图。唐写本,绘十三幅云气与星官图。同类星图示意;非本文所论某一卷原件。
图源:Wikimedia Commons「Dunhuang star map.jpg」(Public domain)
版权归原作者或原机构所有;如涉侵权,请联系本站删除。

《左傳》襄公二十八年留著一句:「歲在星紀而淫於玄枵。」星紀在前,玄枵在後,歲星本該待在星紀,卻往前擠進了玄枵。這個「淫」字,說的是越界。

幾百年後,劉歆把這件事算實了。《漢書·律曆志》裡留著他的一句斷語:「三十二年,歲在星紀,距辛亥百四十五歲,盈一次矣。」

句中的「辛亥」,是僖公五年正月的朔日。劉歆從那個基準點往下推,推到魯昭公三十二年,一百四十五年,歲星整整多走了一次。這一句是他逐年推下來的結果。

中国罗盘,方位刻度与磁针
图 2 中国罗盘。方位刻度盘与磁针合为一器。同类器示意;司南无出土原物,今存者为复原模型,此处不代司南。
图源:Wikimedia Commons,Antic chinese Compass.jpg(Public domain)
版权归原作者或原机构所有;如涉侵权,请联系本站删除。

四、劉歆打了一個補丁

既然發現了,就得修。

劉歆在《三統曆》裡給歲星換了一條規矩:一百四十四年超一次,也就是一百四十四年走一百四十五次。

這條規矩保存在《漢書·律曆志》的三統曆術文裡:

推歲所在,置上元以來,外所求年,盈歲數,除去之,不盈者以百四十五乘之,以百四十四為法。

用今天的話講:先拿一百四十五乘,再除以一百四十四,得出的整數叫「積次」,是歲星走過的星次;餘下來的叫「次餘」,是這一年的零頭。從星紀起數,數到哪就是哪。

這個補丁在曆法史上是有名的一筆。東漢人邊韶在曆法討論裡評它兩句,收在《續漢書·律曆志》:「百四十四歲一超次,與天相應,少有闕謬。」

拿現代的 11.86 年去對,八十五年前後超一次;劉歆說一百四十四年。這個數並不準。

它值得記的地方在別處:這是史書上第一部完整記載下來的曆法裡,頭一回有人把木星的零頭寫進算法。

五、太歲:造一顆假星來記年

超辰還有個麻煩,出在「看」這件事上。

按十二次推算,歲星該在哪一次,是算出來的;它真在哪一次,得抬頭看。算出來的和看到的對不上,紀年的鏈條就斷一節。

於是古人另立了一顆星。這顆星不出現在天上,走法與歲星一樣快,方向相反,順著十二辰一年走一辰。

這顆假星叫太歲。《史記·天官書》裡叫它「歲陰」,《淮南子》裡叫「太陰」,後來通稱太歲。

《史記·天官書》寫「以攝提格歲:歲陰左行在寅,歲星右轉居丑」,說的就是這一對:真星右轉,假星左行,一左一右,互為鏡像。

太歲走的十二辰,就是十二地支。太歲的十二個年名,是攝提格、單閼、執徐、大荒落、敦牂、協洽、涒灘、作噩、閹茂、大淵獻、困敦、赤奮若。十二個年名配上歲陽十名,就是《爾雅·釋天》裡那一套。

按太歲定年名,就不必抬頭看星了,接著往下數就行。

有一處要分清。這裡說的太歲,是那顆假星的走位,屬曆法;後世說流年時講的「流年太歲」,借的是同一個詞,說的是另一件事。兩個「太歲」不能混。

六、最後連假星也不要了

太歲紀年甩掉了觀測,可它每十二年在十二辰上轉一圈,遇上超辰仍要調整。

真正省事的辦法,是換成干支。

十天干配十二地支,六十組一輪,自己轉自己的圈,不看天上任何一顆星。不靠觀測,就不會因為星走得不準而錯位;只要接著數,就能一直往下延。

漢章帝元和二年,公元 85 年,朝廷頒行《元和四分曆》。這一次改曆,正式廢止歲星紀年,改用干支紀年。

從歲星到太歲,再到干支,是一條撤離的路線:先是看著真星記年,接著造一顆假星代替,最後連假星也不要了。

三條路線:看星、造星、不看星

七、十二這個數,有三個來路

一年有十二個朔望月,十二個月加起來三百五十四天多,比回歸年少十一天,閏月就是補這十一天。北斗的斗柄指向又把周天分成十二辰,這是地支月建的直接來路。再加上歲星的十二次,湊成三路。

三路里兩路看得見天,一路算得出月。讓「十二」最終穩下來的,偏偏是那顆星的不可靠。

收尾

古人用木星記年,是因為它走得穩,一眼能看出走到哪兒。等發現它並不那麼穩,就換了一顆假星;假星也有麻煩,就換成干支。

六十甲子轉起來,跟天上那顆木星再沒有關係。十一個零頭攢出來的麻煩,到此為止。

再往後講,要問一個更早的問題:古人眼裡的天,到底是什麼形狀。


A&Q

問:木星繞太陽一圈到底多少年?

答:現代測量是 11.862 年,約 4332.6 天。古人按十二年算,一年差出約五十天。

問:什麼叫歲星超辰?

答:歲星按十二年一周天推算,每年在十二次裡走一次;木星實際走得略快,每年多出約 0.012 次。攢到八十年上下,零頭湊滿一次,歲星就提前越過本該在的那個星次。這個現象叫超辰。

問:十二次和二十八宿怎麼對應?

答:十二次把周天從西向東等分成十二份,每份對應二十八宿裡的一到三宿。星紀配斗、牛,玄枵配女、虛、危,一路排到析木配尾、箕。

問:歲星紀年是什麼時候廢止的?

答:漢章帝元和二年,公元 85 年,頒行《元和四分曆》,廢止歲星紀年,改用干支紀年。

問:這裡的太歲,和民間說的「流年太歲」是一回事嗎?

答:不是。曆法裡的太歲是歲星的鏡像,一顆假想出來的星,順著十二辰走;後世講的流年太歲借的是同一個詞,說的是另一件事。


鄺楚嘉按:這一段曆法史最值得記的,是古人對付誤差的三種辦法。發現星不準,先修算法;算法補不住,造一顆聽話的假星;假星仍麻煩,乾脆換成與天象脫鉤的干支。三步走下來,「十二」這個數留住了,來路卻換了名字。

引用與出處

[1] 左傳[M]. 先秦.

[2] 爾雅[M]. 先秦.

[3] 司馬遷. 史記[M]. 西漢.

[4] 劉安等. 淮南子[M]. 西漢.

[5] 班固. 漢書[M]. 東漢.

[6] 司馬彪. 續漢書[M]. 西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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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Chujia Kuang (鄺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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抬頭과 低頭 사이:중국 고대 천문 역법(天文曆法) 실증 연구의 기원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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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jia Kuang(邝楚嘉)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시수이포 M45 패각 용호
그림 1 푸양 시수이포(濮陽西水坡) M45 패각 용호。앙와 신전장으로 동쪽에 패각 용, 서쪽에 패각 호를 배치했다. 선사 천문 가설로 학계에 논쟁이 있어 여기서는 이해를 돕는 데 그친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Human Burial and shell mosaics. National Museum, Beijing .JPG」(CC BY-SA 4.0)
저작권은 원저자나 원기관에 있습니다. 삭제가 필요하면 본 사이트로 연락해 주십시오.

요지

휴대전화의 성도(星圖) 앱이 답하는 것은 「저기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당(唐)의 둔황(敦煌) 성도나 남송(南宋)의 석각 천문도(天文圖)가 답하는 것은 다른 물음 —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글은 중국 고대 천문 역법(天文曆法)을 다루는 시리즈의 서편(序篇)이며, 결론이 아니라 방법을 말한다. 중국 초기에 하늘을 관측하는 일은 국가의 사업이었다. 역법(曆法)은 파종과 징세의 때를 정했고, 하늘은 정치적 정통성이 요구하는 관측 가능한 증거를 공급했다. 그 배경 위에서 이 시리즈는 「실증(實證)」의 정의를 좁게 잡는다. 관측할 수 있고, 대조할 수 있고, 맞대어 볼 수 있는 자료로 떨어지는 판단만을 실증이라 하고, 그 범위를 넘는 추론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추론이라고 명시한다. 쓰는 자료는 두 개의 다리이다. 전래 문헌(傳世文獻)은 뼈대를 주고, 출토 자료는 그 뼈대를 X선에 걸린다. 읽기 위한 약속은 셋 — 공식을 말하지 않을 것, 천문(天文)과 성점(星占)을 엄격히 나눌 것, 다툼이 있는 지점에는 반드시 표지를 붙일 것. 이 글은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독자적 주장도 예측(豫測)도 하지 않는다.

키워드: 천문학사(天文學史); 중국 고대 역법(中國古代曆法); 갑골문(甲骨文); 전래 문헌(傳世文獻); 사료 비판(史料批判); 성점(星占); 천문 고고학(天文考古學)

이십사절기도
그림 2 이십사절기도(二十四節氣圖)。절기의 명칭과 순서를 보인 것. 같은 유형의 도해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4.3.6.24节气.3.jpg(Public domain)
저작권은 원저자나 원기관에 있습니다. 삭제가 필요하면 본 사이트로 연락해 주십시오.

1. 두 장의 그림: 왜 지금도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휴대전화에 성도(星圖) 앱을 깔고 밤하늘로 향한다. 별자리 선, 행성의 이름, 위성 궤도, 국제우주정거장이 몇 시 몇 분에 머리 위를 지나는지까지 곧바로 화면에 떠오른다. 이 그림은 깨끗하고 즉각적이며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 뒤에는 수백 년의 천체역학, 여러 세대의 탐사 망원경, 그리고 전 세계가 공유하는 좌표계가 있다. 이것이 답하는 것은 「저기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오래된 성도를 그 옆에 펼쳐 본다. 예컨대 당(唐)의 둔황(敦煌) 성도(S.3326), 혹은 남송(南宋) 순우(淳祐) 7년에 쑤저우(蘇州)에서 돌에 새긴 천문도(天文圖). 앞의 것은 먹붓으로 1,300여 개의 별을 곱게 그렸고, 별점은 밝기로 등급을 나누었으며, 은하수는 번진 띠로 나타내고, 이십팔수(二十八宿)의 거도(距度)를 곁에 적었다. 뒤의 것은 북극을 중심으로 하고, 내규(內規)와 외규(外規) 사이에 1,400여 개의 별이 빽빽이 놓였으며,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비스듬히 교차하고, 그림 옆에는 천지의 구조를 설명하는 글까지 새겨져 있다.

이 두 그림은 「즉각적」이지도 「편리」하지도 않다. 지금 이 순간 어느 방향을 보아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과 질서와 인사(人事)에 관한 한 벌의 설명을 선과 먹점 속에 눌러 담고 있다. 이것이 답하는 것은 「우리는 여기에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물음이다. 이미 현대 천문학이 속속들이 설명해 버린 저 하늘을, 왜 지금도 돌아보는가.

답은 땅 위에서 찾아야 한다.

고인(古人)에게 하늘은 하나의 제도였다. 역법(曆法)은 국가의 공공 시계이다.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세금을 거두고, 언제 삭(朔)을 반포하여 사당에 고하는지를 모두 역법이 정했다. 성상(星象)은 정치적 정통성의 설명서였고, 「천명(天命)」은 관측 가능한 증거의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재이(災異)와 상서(祥瑞)는 군권을 묶는 몇 안 되는 부드러운 난간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한 역법의 개정은 흔히 재정·예제(禮制)·황권·학술의 다툼을 불러일으켰다. 일식 예보의 한 번의 실수는 사천(司天) 관리의 관직을 잃게 할 수도 있었고, 한 번의 정변(政變)에 구실을 줄 수도 있었다.

오늘 우리가 올려다보는 것은, 실은 별을 제도에 써 넣은 그 사람들이다.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 하늘은 사라지고 있다. 빛공해 때문에 도시의 아이는 한 해 동안 북두(北斗)를 알아보지 못한다. 꼭 같은 시기에 우리는 전례 없는 규모로 고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있다. 「七月流火」가 혹서(酷暑)의 형용사로 취급되고, 「參商不相見」이 성어 사전의 한 줄 설명으로만 남게 되면, 우리는 시(詩)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사상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도 잃는다. 그래서 실증 연구를 시작하는 첫째 이유는 매우 실질적이다. 완전히 잊히기 전에, 아직 검증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한 번 검증해 둔다.

나 자신에 관해서는, 기원이 더 소박하다. 선인이 어떻게 씨를 뿌렸고, 어떻게 올려다보아 별을 알아보았고, 알아본 별을 어떻게 한 부(部)의 역법(曆法)으로 써냈는가 — 이 몇 가지에 나는 오래 관심을 가져 왔다. 쌓이고 쌓여 지금 눈앞의 이 일련의 해설과 고증(考證)이 되었다. 고인이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역법(曆法)을 정한 내력을, 거기에 얽힌 전고(典故)와 함께 절을 따라 풀어 내려간다.

2. 두 개의 다리: 전래 문헌(傳世文獻)과 지하의 문물

여기서 말하는 「실증(實證)」에는 명확하고 좁은 뜻이 있다. 관측할 수 있고, 대조할 수 있고, 맞대어 볼 수 있는 자료로 떨어지는 판단만을 실증이라 한다. 그 범위를 넘는 추론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추론이라고 명시한다.

이 규칙은 하나의 난처한 사실에서 나왔다. 중국 고대 천문 역법(天文曆法)의 전래 문헌(傳世文獻)은 거의 모두 층루(層累), 곧 누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감석성경(甘石星經)』이다. 이 이름은 전국(戰國)의 감덕(甘德)·석신(石申)의 원저처럼 들리지만, 실은 오래전에 산일(散佚)되었고,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송(唐宋) 이후의 유서(類書)·점경(占經)이 전전하며 인용한 것, 후인의 집보(輯補), 심지어 가탁(假託)한 텍스트가 많다. 이것으로 곧바로 전국(戰國)의 성표(星表)를 논하는 것은 청대(清代)의 거울을 전국(戰國)의 얼굴에 들이대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개원점경(開元占經)』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 「창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구담실달(瞿曇悉達)은 오늘날 이미 실전된 한 무리의 문헌을 통째로 베껴 남기고 출처를 주기(注記)했다. 그래서 추적할 수 있는 자료원이 된다.

전래 문헌(傳世文獻)이 주는 것은 뼈대이다. 뼈대는 후인에 의해 다시 짜맞추어졌을 수 있다.

지하에서 나온 자료의 역할은, 이 뼈대를 X선에 걸리는 데 있다. 지난 백 년의 고고학 발견으로 이 학문은 「교감학(校勘學)의 한 분야」에서 진짜 실증 학문으로 바뀌었다.

증후을(曾侯乙) 묘 칠상(漆箱, 약 기원전 433년): 상자 뚜껑에 주서(朱書)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이름이 적히고 곁에 청룡(青龍)·백호(白虎)가 그려졌다. 현재 볼 수 있는 가운데 가장 이른, 체계를 이룬 이십팔수(二十八宿) 이름의 실물이며, 이 체계의 연대 하한을 전국(戰國) 초기로 직접 못 박는다.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 『오성점(五星占)』과 혜성도(彗星圖): 오행성의 회합주기(會合周期) 수치를 주었고, 그 정밀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혜성도는 형태에 따라 분류하여 그렸고, 세계에서 가장 이른 혜성 형태 도보(圖譜) 가운데 하나이다. 한대(漢代)의 천문 관측에 이미 정량(定量)의 전통이 있었고 점험(占驗)의 글귀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수호지(睡虎地)·팡마탄(放馬灘) 진간(秦簡) 『일서(日書)』: 기층 사회가 역일(曆日)을 어떻게 쓰고 시일(時日)을 어떻게 골랐는지를 보여 준다. 이는 「역법(曆法)이 어떻게 생활로 착지했는가」의 드문 표본이다.

거연(居延)·둔황(敦煌) 한간(漢簡)의 역보(曆譜)와 일적부(日跡簿): 변새(邊塞)의 하급 관리가 날마다 적어 둔 날짜·날씨·이정(里程)은 한대(漢代) 역법(曆法)의 시행을 검증하는 제1차 증거이다.

쑤저우(蘇州) 석각 천문도(天文圖), 쉬안화(宣化) 요묘(遼墓) 성도(星圖): 서로 다른 정권,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의 성도 작성 전통을 가로로 비교하는 좌표를 준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의 의미는 서로 오류를 바로잡는 데 있다. 출토 자료는 전래 텍스트의 후세 덧칠을 뚫을 수 있고, 전래 텍스트는 조각난 출토 잔간(殘簡)에 문맥을 줄 수 있다. 다리 하나에만 기댄 결론은 이 시리즈에서 모두 미완으로 본다.

다만 실증의 경계도 함께 밝혀 두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것은 자료 자체가 우리에게 「증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침묵은 부재(不在)를 뜻하지 않는다. 어떤 시기에 어떤 종류의 성점(星占)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보여 줄 뿐, 「당시에 없었다」를 이끌어낼 수 없다. 고고학은 표본 추출만 할 수 있고 전수 조사는 할 수 없다.

성점(星占)의 의미 세계는 실험할 수 없다. 어떤 일식이 정말 일어났는지, 정말 기록되었는지는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인이 거기서 읽어 낸 「군주에게 근심이 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검증할 수 없다. 그것은 사상사의 과제이다. 천문학은 여기에 관여할 수 없다.

역산(逆算)에는 단단한 흠이 있다. 현대 천체역학으로 삼천 년 전의 천상(天象)을 역산하려면 지구 자전의 장기 변화(ΔT)가 낳는 누적 오차를 다루어야 한다. 같은 일식이라도 역산한 시각과 가시 지대가 수십 분, 수백 킬로미터 어긋날 수 있다. 한 겹이 더 있다. 고대의 기록은 흔히 정치적 목적을 띠고, 기쁜 일은 알리고 근심스러운 일은 알리지 않으며, 사후에 추기(追記)하고, 베껴 쓰다 오류가 생긴다. 한 건의 「응험(應驗)」한 재이(災異) 기록은, 먼저 사건이 있고 뒤에 천상(天象)을 맞춘 것일 수 있다.

반증(反證)은 실증보다 훨씬 힘이 세다. 이것이 이 시리즈의 방법론상의 저선(底線)이다. 우리는 「이 설은 성립할 수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이 설은 반드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두 가지 예를 든다. 마침 이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허난성 푸양(濮陽) 시수이포(西水坡) M45의 방조(蚌塑) 용호(龍虎)와 북두(北斗, 약 기원전 4500년): 도상(圖像)은 분명히 존재하고, 용호의 방위도 분명히 연상을 부른다. 그러나 이를 「사상(四象)」이나 「북두(北斗)」의 초형(雛形)으로 해독하면, 그 사이에 육천 년의 자료 공백이 있다. 이것은 가설이다. 아직 결론을 내릴 단계가 아니다.

산시성 샹펀(襄汾) 타오쓰(陶寺) 유적의 관상대(觀象臺, 약 기원전 2100년): 발굴자는 열세 개의 판축(版築) 기둥이 관측 틈을 이루어 동지(冬至)·하지(夏至) 등의 절기(節氣)를 정하는 데 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가 발표된 뒤, 학계는 주초(柱槽)의 성인(成因), 관측의 실행 가능성, 연대 대응 등에 관한 일련의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지금도 검토가 필요한 방안이며, 교과서에 정설로 써 넣어서는 안 된다.

경계를 인정해야 이 학문이 설 수 있다.

3. 세 가지 독서의 약속

위의 입장을 독서 속으로 떨어뜨리려면, 먼저 세 가지 약속을 세워야 한다.

약속 하나: 공식을 말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역법(曆法)의 추보(推步)를 도출하지 않고, 구면삼각법을 늘어놓지 않고, 한 줄의 천문 알고리즘도 주지 않는다. 이는 기술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무관하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 계산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내가 반쯤 아는 방식으로 옮겨 말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추산에 관한 곳에서는 세 가지만 말한다. 어떤 기록을 입력했고, 어떤 결과를 얻었고, 오차가 어디서 올 수 있는가. 끝까지 파고들고 싶은 독자를 위해, 글 끝에 원전과 전문 연구 서목을 붙였다. 진짜 공식은 거기에 있다.

약속 둘: 「천문(天文)」과 「성점(星占)」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 두 말은 현대 중국어에서 흔히 혼용되지만, 고대에는 두 가지 다른 조작이었다.

  천문(天文) 성점(星占)
대상 관측할 수 있는 위치·주기·시각 천상(天象)과 인사(人事)의 대응 관계
방법 측정·기록·추보(推步)·검증 취상(取象)·비부(比附)·해설
검증 가능성 역산할 수 있고 대조할 수 있다 반증할 수 없다(해석은 언제나 조정 가능)
이 시리즈의 태도 과학사로 다룬다 사상사·정치사로 다룬다

다시 말해, 나는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의 성관(星官) 체계와 그 실측(實測)의 기초를 진지하게 논하고, 그 뒤에 있는 권력의 논리도 또한 진지하게 논한다. 그러나 오늘의 천문학으로 점사(占辭)의 영험(靈驗)을 「증명」하지는 결코 않고, 「미신(迷信)」 두 글자로 몰아내지도 결코 않는다. 오늘의 천문학으로 점사(占辭)의 영험을 증명하는 것은 사이비과학이고, 미신이라고 한마디로 끊어 버리는 것은 게으름이다.

약속 셋: 다툼이 있으면 반드시 표시한다.

이것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엄하게 정한 체례(體例)이다. 학계에 아직 합의가 없는 곳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명확한 표지로 드러내고, 어느 한 집안의 설을 사실로 쓰지 않는다. 표지는 세 단계이다.

【통설(通說)】 다수의 연구자가 받아들이고, 증거의 사슬이 비교적 온전하다.

【일설(一說)】 상당한 학자가 주장하지만, 증거가 부족하거나 경합하는 해석이 존재한다.

【요검(要檢)】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검증할 수 있는 관건적 증거가 아직 없다.

예컨대, 「『춘추(春秋)』에 기록된 일식은 그 다수가 현대의 역산과 맞는다【통설(通說)】」. 「『天再旦于鄭』은 기원전 899년의 일식이며, 단대(斷代)의 지점이 될 수 있다【일설(一說)】」. 「시수이포(西水坡)의 방조(蚌塑)는 북두(北斗)와 사상(四象)의 초형(雛形)을 나타낸다【요검(要檢)】」.

믿든 말든 그것은 당신의 몫이지만, 자신이 어느 것을 믿고 있는지는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4. 그래서, 여기서 출발한다

1054년, 송(宋)의 사천감(司天監)은 하나의 「객성(客星)」을 적어 두었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는 「지화(至和) 원년 5월 기축(己丑), 천관(天關) 동남쪽 몇 치에 나왔고, 한 해 남짓 지나 차츰 사라졌다」고 적었고, 『송회요(宋會要)』 권52는 그것이 「낮에는 태백(太白)처럼 보였고, 광망(光芒)이 사방으로 뻗쳤으며, 빛깔은 붉고 희었고, 모두 23일 동안 보였다」고 덧붙여 서술한다.

구백 년 뒤, 천문학자들은 그 하늘 영역이 송(宋) 사람이 적은 「천관(天關)」, 곧 오늘날의 게성운(蟹星雲)임을 알아냈다. 그러나 팽창 속도로 역산하자, 산출된 연대는 1054년보다 80년에서 120년이나 늦다. 이 맞지 않는 숫자가 역으로 새로운 인식을 밀어냈다. 그 성운은 가속 팽창하고 있다.

내 눈에는, 실증 연구의 가장 감동적인 모습이 이렇다. 구백 년 동안 베껴진 한 구절과, 구백 년 뒤에 발명된 기계가 같은 하나의 물음을 향해 간다. 첫 번째로 나온 숫자가 맞지 않더라도, 그 또한 하나의 만남이다. 그 순간, 고인이 올려다보는 동작과 우리가 숙여 보는 동작이 이어진다.

이 시리즈가 하려는 것은, 그런 접점을 되도록 많이 찾는 것이다. 찾지 못하는 곳은,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표시한다.

첫 접점이 어디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본다. 사천 년 전, 한 부족의 수령이 언제 씨를 뿌릴지를 정해야 했다. 그의 손에는 시계도 없었고, 역법(曆法)도 없었다.

5. 이 시리즈는 어떻게 나아가는가

구조를 먼저 밝혀 둔다. 전 시리즈는 시간으로 편(編)을 나누어, 먼저 선진(先秦), 거기서 진한(秦漢)으로, 다시 명청(明清)으로 내려간다. 합집(合集) 하나 「선진 역법 원류고(先秦曆法源流考)」는 「정성 관측(定性觀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에는 좌표도 도수(度數)도 없었고, 쓸 수 있는 것은 올려다보아 보이는 별과 낮밤 길이의 변화뿐이었다.

번호 편명 상태
서편 抬頭과 低頭 사이:중국 고대 천문 역법 실증 연구의 기원 이 글
001 요전(堯典) 사중중성(四仲中星):맞지 않는 한 벌의 숫자 게재 완료
002 갑골문(甲骨文) 「日有食之」 제조의 검증 가능성 게재 완료
003 증후을(曾侯乙) 묘 칠상(漆箱) 이십팔수도(二十八宿圖):사상(四象) 체계의 하한 게재 완료
004 규표측영(圭表測影)과 「日至」:등봉(登封) 관성대(觀星臺) 이전의 실측 전통 게재 완료(해외 네 계통)
005 「전욱력(顓頊曆)」과 진(秦)·한(漢) 초기 역법(曆法)의 고고학적 증거 게재 완료(해외 네 계통)
006 『태초력(太初曆)』『삼통력(三統曆)』:삭책(朔策)과 윤주(閏周)의 오차 집필 예정
007 『주비산경(周髀算經)』 귀영(晷影) 데이터와 전국(戰國) 초백서(楚帛書) 십이월신도(十二月神圖)(택일) 선정 중
008 수속편(收束篇):검증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의 분계 집필 예정

이 합집(合集)이 답하려는 것은 결국 한 구절이다. 시계도 좌표계도 없을 때,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날을 정했는가.

텍스트에 대하여

이 글은 통속적인 해설이며, 독자적인 연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한 천문 상수는 표준적인 값이다. 이 한국어판은 중국어 원문과 같은 글의 다른 언어판으로서 함께 공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은 邝楚嘉, Chujia Kuang. 필명은 嘉言一得(Jiayan Yide)이다.

선언

자금 지원. 이 연구는 외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이해 상충. 저자에게 신고할 이해 상충은 없다.

자료 이용 가능성. 이 연구에서 새로 작성하거나 분석한 자료는 없다.

언어. 중국어 원문은 이 기록의 부속 파일로 등록되어 있다.

인용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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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周髀算經 [Zhoubi Suanjing]. 저자 미상. 前漢(성립 연대에 이견 있음).

이 글의 그림은 보충 설명을 위한 것이며, 증거가 아니고 사실의 근거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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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Three Calendars, Three Kinds of Time —— the three scales and what each is set to.

사이트 허브:역법 술어표 | 역법 기록: 한 해는 어느 날부터 세는가 | 데이터셋과 프리프린트

이 글의 모든 데이터는 邝楚嘉가 수집·정리하였다.


作者:嘉言一得(邝楚嘉)|独立研究者,致力于可核验的原始文献与历法数据归档。
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平实记录 · 数据集 · 预印本:GitHub / WordPress / Zenodo(DOI: 10.5281/zenodo.22788686 / 10.5281/zenodo.23028692)
Records · Datasets · Preprints: GitHub / WordPress / Zenodo
学术身份 · Academic identity:ORCID 0009-0002-7650-833X | OpenAlex A5151908354

「전욱력(顓頊曆)」과 진(秦)·한(漢) 초기 역법(曆法)의 고고학적 증거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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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jia Kuang(邝楚嘉)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요지

이 글은 오직 한 구절의 기록으로만 알려져 온 하나의 역법(曆法)을 다룬다. 사서(史書)는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전욱력(顓頊曆)」을 채택하고 세수(歲首)를 시월(十月)로 정했으며 조하(朝賀) 또한 그 달 초하루부터 세었다고 전한다. 한(漢)은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무제(武帝)의 태초(太初) 개력(改曆, 기원전 104년)까지 고치지 않았다. 역법(曆法) 자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해가 며칠이고 어느 달이 크고 어느 달이 작으며 윤달(閏月)을 어디에 두고 어느 날이 초하루인지는 전래 문헌(傳世文獻)이 말하지 않는다. 출토 간독(簡牘)이 그것을 말한다. 이 글은 종이 위의 세 가지 기록과 출토된 세 무리의 역보(曆譜) — 징저우(荊州) 저우자타이(周家台) 30호묘의 진시황(秦始皇) 34년(기원전 213년) 역보, 장자산(張家山) 247호묘의 18매 간독(한 고조 5년부터 여후 2년, 기원전 202—186년), 인취산(銀雀山) 2호묘의 32매 죽간 표(원광 원년, 기원전 134년. 송(宋)의 『자치통감목록(資治通鑑目錄)』이 천 년 동안 전한 오류를 바로잡은 것) — 를 맞대어, 윤달(閏月)이 왜 「후구월(後九月)」이라 불렸는지를 설명하고, 수호지(睡虎地) 『일서(日書)』의 진초(秦楚) 월명 대조표를 제시하며, 간독(簡牘)이 뒷받침할 수 있는 부분과 추론(推論)에 머무는 부분을 나눈다. 어떤 설이 통설이 아니라 일설인 경우에는 【일설(一說)】을 붙인다. 이 글은 서술에 그치며 예측(豫測)은 하지 않는다.

진한 《일서》 죽간
그림 1 진한(秦漢) 《일서(日書)》 죽간.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팡마탄(放馬灘) 출토 원물이 아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Qin Rishu Bamboo Slips」(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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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전욱력(顓頊曆); 진력(秦曆); 한초력(漢初曆); 후구월(後九月); 윤달(閏月); 간독(簡牘); 저우자타이(周家台); 장자산(張家山); 인취산(銀雀山); 수호지(睡虎地); 진초 월명(秦楚月名); 중국 역법(中國曆法)

이십팔수도
그림 2 이십팔수도(二十八宿圖)。이십팔수를 늘어놓아 그린 그림. 같은 유형의 도해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본문의 원물이 아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Twenty-eight mansions.jpg(Public domain)
저작권은 원저자나 원기관에 있습니다. 삭제가 필요하면 본 사이트로 연락해 주십시오.

머리말

진(秦) 사람들이 새해를 쇠었던 때는 시월(十月)이었다.

이 일은 사서(史書)에 적혀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사용한 것은 「전욱력(顓頊曆)」이었고, 세수(歲首)는 시월로 정해졌으며, 조정의 조하(朝賀)도 그 달 초하루부터 세었다. 한(漢)이 이를 이어받아 따로 고치지 않고 무제(武帝) 태초(太初) 원년까지 그대로 썼다.

종이 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한 구절뿐이다. 역법(曆法) 자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 해가 며칠인지, 어느 달이 크고 어느 달이 작은지, 윤달(閏月)이 어디에 놓이는지, 어느 날이 초하루인지 — 전혀 없다.

그 뒤 무덤에서 간독(簡牘)이 잇따라 나왔다. 어떤 것은 진시황(秦始皇) 34년 한 해의 일간지(日干支)를 베껴 두었고, 어떤 것은 한 고조(高祖) 5년부터 여후(呂后) 2년까지의 삭일(朔日)을 하루씩 펼쳐 두었으며, 또 어떤 것은 표로 만들어 길이 예순아홉 센티미터의 죽간(竹簡) 위에 늘어놓았다.

종이 위의 그 한 구절은, 이때에 이르러 그 아래에 깔린 것을 얻었다.

1. 종이 위에서만 본 이름

먼저 이 이름부터 시작한다.

「전욱력(顓頊曆)」은 「고육력(古六曆)」의 하나이다. 고육력(古六曆)이란 황제(黃帝)·전욱(顓頊)·하(夏)·은(殷)·주(周)·노(魯) 여섯 가지 역법을 가리키며,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는 이를 나란히 기록해 두었다. 여섯 가운데 통일 왕조의 관력(官曆)으로 실제 채택된 것은 전욱력(顓頊曆)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짜였는지는 오래도록 방증(傍證)뿐이었다. 고인(古人)은 이것을 사분력(四分曆)이라 하여, 한 해를 365일과 4분의 1일로 보았다. 이 수는 앞선 글에서 규표(圭表)로 계산한 바 있다. 네 해에 걸쳐 동지(冬至)의 그림자 길이를 재면 그림자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 사이는 1,461일이며, 이를 4로 나누면 그 수가 나온다. 사분력(四分曆)이라는 이름은 그 끝자리에서 왔다.

한(漢) 초기의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한 구절이 더 있다.

反覆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而成一岁……天一以始建七十六岁,日月复以正月入营室五度无余分,名曰一纪。

76년이면 일월(日月)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를 일기(一紀)라 한다. 전욱력(顓頊曆)의 토대는 이 하나의 수 위에 있다.

그러나 종이 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수가, 당시의 역관(曆官)이 실제로 그렇게 계산했다는 것과 같지는 않다. 이것을 확실히 하려면 그들이 스스로 남긴 것을 보아야 한다.

2. 종이 위의 증거

먼저 종이 위에 적힌 세 가지 기록을 제시한다.

첫째는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이다.

始皇推终始五德之传,以为周得火德,秦代周德,从所不胜。方今水德之始,改年始,朝贺皆自十月朔。

「개년시(改年始)」란 한 해의 시작을 고쳤다는 뜻이다. 「조하개자시월삭(朝賀皆自十月朔)」이란 조정의 조하(朝賀)를 모두 시월 초하루부터 세었다는 뜻이다. 당(唐)의 장수절(張守節)은 이 구절에 주(注)를 달아 말한다.

周以建子之月为正,秦以建亥之月为正,故其年始用十月而朝贺。

주(周)는 건자(建子)의 달을 정월(正月)로 삼고, 진(秦)은 건해(建亥)의 달을 정월로 삼았다. 그래서 한 해의 시작이 시월에 떨어진다.

둘째는 『사기(史記)』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이다. 한(漢) 초기의 승상 장창(張蒼)은 진(秦) 때 어사(御史)를 지냈고, 궁중의 도서와 율력(律曆)을 맡았다. 한(漢)이 나라를 세우자 그는 새 왕조를 위해 역법(曆法)을 정리했다.

张苍为计相时,绪正律历。以高祖十月始至霸上,因故秦时本以十月为岁首,弗革。

유방(劉邦)은 시월에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파상(霸上)에 이르렀다. 장창(張蒼)은 진(秦)이 본래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았으니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 열전(列傳) 끝에서 사마천(司馬遷)은 한 줄의 평을 덧붙인다.

张苍文学律历,为汉名相,而绌贾生、公孙臣等言正朔服色事而不遵,明用秦之颛顼历,何哉?

가의(賈誼)와 공손신(公孫臣) 등은 역법(曆法)과 정삭(正朔)의 개정을 주장했으나, 장창(張蒼)은 아예 듣지 않고 「명용진지전욱력(明用秦之顓頊曆)」, 명백히 진(秦)의 전욱력(顓頊曆)을 썼다. 이 반문(反問)은 전욱력(顓頊曆)이 『사기(史記)』에 모습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셋째는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이다. 반고(班固)는 이 일을 가장 완전하게 서술한다.

汉兴,方纲纪大基,庶事草创,袭秦正朔。以北平侯张苍言,用《颛顼历》,比于六历,疏阔中最为微近。然正朔服色,未睹其真,而朔晦月见,弦望满亏,多非是。

「습진정삭(襲秦正朔)」은 진(秦)의 역법(曆法)을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용《전욱력(顓頊曆)》」은 쓴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비우육력(比于六曆),소활중최위미근(疏闊中最為微近)」은 다른 다섯 가지와 견주면 가장 거칠지만, 그 가운데서도 실제 천상(天象)에 가장 가깝다는 뜻이다. 마지막 구절이 중요하다. 이 역법(曆法)을 오래 쓰는 동안 삭일(朔日)은 맞지 않게 되었고, 그믐날에는 달이 아직 보였으며, 현망(弦望)의 날짜도 자주 틀렸다. 무제(武帝)가 훗날 개력(改曆)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이 위의 세 기록은 같은 하나를 가리킨다. 진(秦)과 한(漢) 초기는 「전욱력(顓頊曆)」이라는 이름의 역법(曆法)을 쓰고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짜였는지는 종이 위에 여전히 적혀 있지 않다.

3. 땅 위의 증거 · 진(秦)

1993년 상반기, 후베이성 징저우(荊州) 사스구(沙市區) 관쥐향(關沮鄉)에서 고고대(考古隊)가 진(秦) 무덤 하나를 발굴했다. 번호는 저우자타이(周家台) 30호이다. 무덤에서는 죽간(竹簡) 387매가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역보(曆譜) 하나가 있다. 진시황(秦始皇) 34년, 곧 기원전 213년, 한 해 전체의 일간지(日干支)를 베껴 쓴 것이다.

이 역보(曆譜)를 쓰는 방식은 오늘날의 벽걸이 달력과는 다른 계통이다. 간(簡)의 길이는 29센티미터 남짓, 한 매의 간을 세로로 여섯 단으로 나누어 한 단이 한 달에 해당한다. 먼저 여섯 개의 작은달을 베껴 쓴다. 시월·십이월·이월·사월·유월·팔월, 모두 29일이다. 다음에 여섯 개의 큰달을 베껴 쓴다. 십일월·정월·삼월·오월·칠월·구월, 모두 30일이다. 작은달과 큰달이 번갈아 끝까지 이어진다. 마지막에 다시 한 달, 후구월(後九月)을 30일치 더한다.

열두 달에 윤달(閏月) 하나를 더하면 합계 384일이다. 이 해에 남는 한 달은 구월 뒤에 걸려 있었다.

간(簡)에는 다른 글자도 있다. 일간지(日干支) 외에 무덤 주인의 행적이 흩어져 적혀 있다. 어느 날은 징링(竟陵)에 묵고, 어느 날은 장링(江陵)에 묵고, 어느 날은 황유(黃郵)에 묵고, 어느 날은 징링(竟陵)에서 공무를 보았으며, 정월에는 「가평시사(嘉平視事)」 한 줄이 있다. 연구자들은 이 글자들을 무덤 주인의 출장과 집무로 읽는다. 하나의 역보(曆譜)가 수첩으로 쓰인 것이다.

같은 무덤에서는 목독(木牘) 한 점도 나왔다. 앞면에는 진 이세(秦二世) 원년(기원전 209년) 각 달 삭일(朔日)의 일간지(日干支), 뒷면에는 십이월의 일간지, 상단에는 「정부소(廷賦所)」 같은 글자가 있다. 같은 무리의 간(簡)에는 진시황(秦始皇) 36년·37년의 월삭(月朔) 일간지와 달의 대소(大小)도 있으며, 36년의 것에는 뒤에 편제(篇題)가 붙어 「삽육년일(卅六年日)」이라 적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역보(曆譜)에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4. 땅 위의 증거 · 한(漢) 초기

1983년 말, 후베이성 장링(江陵) 장자산(張家山), 247호 한묘(漢墓)에서 죽간(竹簡) 한 무리가 출토되었다. 그중 18매, 간(簡)의 길이는 23센티미터, 본래 편제(篇題)가 없어 정리자가 이름을 붙여 「역보(曆譜)」라 불렀다.

18매의 간, 한 해에 한 매. 각각 위에서 아래로 그해 열두 달에 윤달(閏月)을 더한 삭일(朔日) 일간지(日干支)를 적는다. 첫째부터 아홉째는 한 고조(高祖) 5년(기원전 202년)부터 12년. 열째부터 열여섯째는 혜제(惠帝) 원년부터 7년. 열일곱째·열여덟째는 여후(呂后) 원년부터 2년. 가장 늦은 기록은 여후(呂后) 2년의 후구월(後九月)에 이른다.

이는 현재 찾을 수 있는 가운데 가장 이른, 전한(前漢) 초기의 실용(實用) 역보(曆譜)이다. 「실용(實用)」 두 글자에는 무게가 있다. 후인이 추산한 표가 아니라, 당시 사람이 베껴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4월, 산둥성 린이(臨沂) 인취산(銀雀山) 2호 한묘(漢墓). 이 무덤에서 나온 역보(曆譜)는 앞의 두 점보다 짜임새가 정교하다.

간(簡)은 모두 32매, 길이 69센티미터, 한 척(漢尺)으로 꼭 세 자[三尺]이다. 첫째 매는 해를 적고, 둘째 매는 달을 적고, 셋째 매부터는 한 매에 하루를 적는다. 32매를 펼치면 하나의 표가 된다.

기록된 달은 열셋. 시월부터 시작하여 십일월·십이월·정월…… 구월까지 이어지고, 끝에 다시 후구월(後九月) 하나를 더한다.

출토지 연대 형태 기록된 내용
후베이성 징저우 저우자타이 30호 진묘 진시황 34년(기원전 213) 죽간, 한 매를 여섯 단으로 나눔 한 해 일간지, 작은달·큰달이 번갈아, 끝은 후구월
후베이성 장링 장자산 247호 한묘 한 고조 5년(기원전 202)—여후 2년(기원전 186) 죽간 18매, 길이 23센티미터 한 해에 한 매, 각 달 삭일 일간지를 위에서 아래로
산둥성 린이 인취산 2호 한묘 무제 원광 원년(기원전 134) 죽간 32매, 길이 69센티미터 표를 가로로 읽음, 열세 달, 역주(曆注) 딸림

이 역보(曆譜)에는 역주(曆注)도 딸려 있다. 날짜 외에 납일(臘日)·동지(冬至)·하지(夏至)·입춘(立春)·입추(立秋), 다시 초복(初伏)·중복(中伏)·후복(後伏), 곧 삼복(三伏), 그리고 「반지(反支)」라는 한 종류의 날이 표시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점이다. 이 역보(曆譜)는 그해 십이월과 정월이 모두 30일, 앞뒤로 두 개의 큰달이 이어진다고 적는다. 송(宋)의 『자치통감목록(資治通鑑目錄)』은 이를 작은달로 적었다. 천 년이 넘도록 역사를 읽는 이들은 모두 그 책을 따랐고, 간(簡)이 나온 뒤에야 본래대로 돌아왔다.

첫째 매의 간(簡)에는 본래 편제(篇題)가 있었는데, 글자의 읽는 법에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이는 「칠년시일(七年視日)」로 읽고, 정리자는 따로 「원광원년역보(元光元年曆譜)」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제(武帝)의 「건원(建元)」 연호에는 7년이 없다. 건원(建元) 7년은 이미 개원(改元)되어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년)이었다.

5. 「후구월(後九月)」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앞의 세 역보(曆譜)에는 모두 「후구월(後九月)」이 있다. 이 달 이름은 따로 한 절을 두어 설명해야 한다.

달은 29일 반 남짓에 한 바퀴 돌고, 열두 달을 합치면 354일쯤 된다. 해[太陽]는 365일 남짓에 한 바퀴 돈다. 그 차이 열흘 남짓은 두세 해를 모으면 한 달에 해당한다. 이 한 달을 채워 넣는다. 이를 윤달(閏月)이라 한다.

그것을 어디에 넣는지는 집집마다 달랐다. 진(秦)과 한(漢) 초기의 방식은 윤달(閏月)을 한 해의 끝에 두고 「후구월(後九月)」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인(古人)은 이 방식에 이름을 붙여 「귀여어종(歸餘於終)」이라 했다. 남은 날수를 해 끝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사분력(四分曆)의 윤주(閏周)는 19년 7윤(閏)이다.

해 끝이 왜 구월인가. 세수(歲首)가 시월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시작이 시월이면 끝은 자연히 구월에 떨어지고, 남는 한 달은 구월 뒤에 걸린다. 이렇게 그해는 열세 달이 된다.

「후구월(後九月)」이라는 이름은 매우 이르게 나타난다. 수호지(睡虎地) 진간(秦簡)에 「편년기(編年記)」라는 한 편이 있어 해마다 큰일을 베껴 적는다. 진 소왕(秦昭王) 56년 대목에는 한 구절만 있다.

五十六年,后九月,昭死。

진 소왕(秦昭王)이 이 해에 죽었고, 때를 적는 데 「후구월(後九月)」을 썼다. 소왕(昭王) 56년은 기원전 251년이다. 이 달 이름은 그때 이미 쓰이고 있었다.

일본 학자 구리하라 도모노부(栗原朋信)는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의 기사 순서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진 소왕(秦昭王) 42년에는 「시월」이 「구월」 앞에 적히고, 48년에는 「시월」이 「정월」 앞에 적혀 있다. 【일설(一說)】 그는 여기서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은 것이 진시황(秦始皇) 26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추론했다. 이 점은 간독(簡牘)이 나온 뒤 실물이 곁에 놓였다.

6. 진(秦)과 초(楚), 두 벌의 달 이름

여기까지는 진(秦)의 달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진(秦)이 쳐서 얻은 땅은 본래 남의 나라였다. 초(楚) 땅 사람들은 달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1975년 12월, 후베이성 윈멍(雲夢) 수호지(睡虎地) 11호 진묘(秦墓)에서 죽간(竹簡) 한 무리가 출토되었다. 그중 『일서(日書)』 갑종(甲種) 안에 진초(秦楚)의 월명(月名) 대조표가 끼어 있다. 한 달씩 펼치면 이러하다.

진(秦)의 달 초(楚)의 달 진(秦)의 달 초(楚)의 달
시월 동석(冬夕) 사월 칠월
십일월 굴석(屈夕) 오월 팔월
십이월 원석(援夕) 유월 구월
정월 형이(刑夷) 칠월 시월
이월 하(夏) 팔월 찬월(爨月)
삼월 방월(紡月) 구월 헌마(獻馬)

진(秦)의 시월을 초(楚)는 동석(冬夕)이라 한다. 진(秦)의 십일월을 초(楚)는 굴석(屈夕)이라 한다. 진(秦)의 십이월을 초(楚)는 원석(援夕)이라 한다. 그 아래 이름은 더욱 달 이름 같지 않다. 형이(刑夷)·방월(紡月)·찬월(爨月)·헌마(獻馬).

이 초(楚) 월명(月名)들은 이전에는 그것이 달의 이름임을 아무도 몰랐다. 신양(信陽) 장타이관(長台關) 편종(編鐘)의 명문(銘文)에 「굴란(屈欒)」 같은 글자가 있어 오래도록 읽히지 않았다. 대조표가 나오고 나서야 그것이 초(楚)의 월명(月名)임을 알았다.

이 표는 하나를 말하고 있다. 진(秦)은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았으나, 달 자체는 여전히 하정(夏正)을 따랐다. 정월은 여전히 정월이고, 북두(北斗)가 건인(建寅)을 가리키는 달은 그 달을 여전히 정월이라 부른다. 진(秦)과 초(楚)의 달이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7. 역법(曆法)은 누구의 일인가

앞의 몇 절은 간(簡) 위에 보이는 것을 다루었다. 한 겹이 더 있는데, 그것은 간(簡) 바깥에 적혀 있다.

진(秦)은 왜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았는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는 이유를 덕운(德運)에 두고 천상(天象)은 말하지 않는다. 그 대목이 말하는 것은 수덕(水德)이다. 주(周)는 화덕(火德)을 얻었고, 진(秦)은 주(周)를 대신했으니 화(火)를 이기는 것을 얻는다. 그것이 물[水]이다. 수덕(水德)의 시작, 그러므로 「개년시(改年始)」, 그러므로 「조하개자시월삭(朝賀皆自十月朔)」, 그러므로 의복과 기치가 「개상흑(皆上黑)」, 그러므로 「수이육위기(數以六為紀)」.

한 해의 첫날을 어디로 옮기는가는 하나의 자세이다. 이 왕조가 뿌리째 바뀌었음을 천하에 알리고 있다.

한(漢) 초기가 고치지 않은 것도 자세이다. 장창(張蒼)은 새 왕조를 위해 율력(律曆)을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진(秦)의 옛 역법(曆法)을 쓰고, 한편으로는 오덕(五德)을 추산하여 한(漢)도 수덕(水德)이라 했기에 「상흑여고(尚黑如故)」라 말했다. 그는 진(秦)의 한 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설(一說)】 다만 이 수덕설(水德說)에는 훗날 전문(專文)으로 의문을 제기한 이가 있어, 「진(秦)이 수덕(水德)을 썼다」는 후인의 부연(敷衍)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는 그대로 적어 둔다.

정치는 정치로 두고, 역법(曆法) 위의 일은 여전히 셀 수 있다. 전욱력(顓頊曆)은 진(秦)의 통일 해(기원전 221년)부터 무제(武帝) 원봉(元封) 7년(기원전 104년) 개력(改曆)까지 앞뒤로 117년이다. 한(漢)의 개국부터 개력(改曆)까지 반고(班固)는 「한흥백이세의(漢興百二歲矣)」, 102년이라 적는다.

백 년 남짓을 같은 하나의 역법(曆法)으로 쓰고, 삭일(朔日)이 맞지 않고 보름달도 그믐달도 맞지 않게 되어서야 바꾸려 했다.

8. 어느 부분이 확인되고, 어느 부분이 추론일 뿐인가

돌아보면, 종이 위와 땅 아래를 합쳐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만하다.

진(秦)과 한(漢) 초기는 「전욱력(顓頊曆)」이라는 이름의 역법(曆法)을 쓰고 시월을 세수(歲首)로 삼았다. 종이 위에 셋, 간(簡) 위에 세 무리, 그것이 맞는다. 한 해의 달은 시월부터 늘어서 구월에 이르고, 윤달(閏月)은 구월 뒤에 놓여 「후구월(後九月)」이라 불린다. 달은 대소(大小)가 번갈아 나아가고 끝에 후구월(後九月) 하나를 더한다. 이는 저우자타이(周家台)와 인취산(銀雀山) 두 역보(曆譜)에서 모두 보인다. 진(秦) 땅의 월명(月名)과 초(楚) 땅의 월명(月名)은 두 벌이다.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또한 밝혀 두어야 한다.

간(簡)은 끊겨 있다. 저우자타이(周家台)의 것은 34년을 베꼈고, 같은 무덤에 36년·37년의 월삭(月朔)도 있어 해는 이어지지만 그 사이의 공백은 채울 수 없다. 장자산(張家山)의 18매 간(簡)은 여후(呂后) 2년 후구월(後九月)에서 끝나고, 그 뒤는 다른 자료로 이어야 한다. 각지에서 쓴 역(曆)이 같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같은 무리의 진간(秦簡) 안에서도 삭일(朔日) 일간지(日干支)가 하루 어긋나는 예가 한두 곳이 아니다. 연구자 가운데에는 그것이 반드시 계산 착오가 아니라, 의거한 역법(曆法) 자체에 선후(先後)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전욱력(顓頊曆)」이라는 이름 아래에 도대체 어느 알고리즘이 들어 있었는지도 역시 추론이다. 사분력(四分曆), 19년 7윤(閏), 76년 1기(紀) — 이 수들은 후대의 문헌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관(曆官)의 손에 있던 것이 정확히 계산되었는지는 간(簡) 위에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무덤 속 그 사람이 역보(曆譜)를 베껴 쓸 때, 이천 년 뒤 사람에게 남기려 했다고는 아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언제 출장하고 언제 집무했는지를 적었을 뿐이다.

텍스트에 대하여

이 글은 통속적인 해설이며, 독자적인 연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한 역법(曆法)상의 사실은 전래 문헌(傳世文獻)과 출토 자료에 따른다. 이 한국어판은 중국어 원문과 같은 글의 다른 언어판으로서 함께 공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은 邝楚嘉, Chujia Kuang. 필명은 嘉言一得(Jiayan Yide)이다.

중국어 술어(術語)는, 그 말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는 원래의 한자 그대로 남겼다.

선언

자금 지원. 이 연구는 외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이해 상충. 저자에게 신고할 이해 상충은 없다.

자료 이용 가능성. 이 연구에서 새로 작성하거나 분석한 자료는 없다.

언어. 중국어 원문은 이 기록의 부속 파일로 등록되어 있다.

인용과 출처

[1] 史記 [Shiji]. 漢.

[2] 漢書 [Hanshu]. 漢.

[3] 淮南子 [Huainanzi].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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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 [Bamboo Slips from the Han Tomb at Zhangjiashan (Tomb 247)]. 北京: 文物出版社, 2001.

[6] 吳九龍. 銀雀山漢簡釋文 [Transcriptions of the Han Bamboo Slips from Yinqueshan]. 北京: 文物出版社, 1985.

[7] 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組. 睡虎地秦墓竹簡 [Bamboo Slips from the Qin Tomb at Shuihudi]. 北京: 文物出版社, 1990.

[8] 栗原朋信. 秦漢史の研究 [Kurihara Tomonobu, Studies in Qin and Han History]. 東京: 吉川弘文館,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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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者:嘉言一得(邝楚嘉)|独立研究者,致力于可核验的原始文献与历法数据归档。
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平实记录 · 数据集 · 预印本:GitHub / WordPress / Zenodo(DOI: 10.5281/zenodo.22788686 / 10.5281/zenodo.23028692)
Records · Datasets · Preprints: GitHub / WordPress / Zenodo
学术身份 · Academic identity:ORCID 0009-0002-7650-833X | OpenAlex A5151908354

규표(圭表) 측영(測影)과 「일지(日至)」:덩펑(登封) 관성대(觀星臺) 이전의 실측(實測) 전통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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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jia Kuang(邝楚嘉)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덩펑 관성대
그림 1 덩펑 관성대(登封觀星臺)。원대 곽수경(郭守敬)이 세웠으며 측영대와 양천척이 남아 있다. 같은 유형의 건조물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본문의 원물이 아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Dengfeng Observatory.jpg」(CC BY-S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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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

허난성(河南省) 덩펑(登封)의 가오청(告成) 마을에는, 길이 36미터의 돌로 된 규(圭)를 등지고 청벽돌로 쌓은 대(臺)가 서 있다. 그것은 원(元) 시대에 궈서우징(郭守敬)의 주도로 정오의 그림자를 재기 위해 세워졌고, 그 자리에 놓인 것은 그보다 앞선 이천 년에 걸쳐 대를 이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중(地中)」 — 천하의 중심 — 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니다. 한 자의 눈금을 읽은 값이다. 하지(夏至) 정오, 여덟 자[八尺]의 표(表)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꼭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이 글은 덩펑(登封) 관성대(觀星臺)에 이르기까지의 측량 전통을 서술한다. 같은 하나의 막대기와 그림자에서 읽혀 온 두 가지 — 방향과 길이 — 를 갈라놓고, 「일지(日至)」, 즉 해가 극에 이른다는 말을 갑골복사(甲骨卜辭)에서 『좌전(左傳)』을 거쳐 후자가오창(胡家草場) 출토 전한(前漢) 역보(曆譜)까지 더듬고, 표(表)와 규(圭)를 설명하고, 타오쓰(陶寺) 출토의 칠한 막대기 — 171.8센티미터, 같은 종류의 출토 기물로서는 가장 이른 것 — 를 그려내고, 「지중(地中)」이 하나의 읽음이며 따라서 위도(緯度)에 따라 옮겨 간다는 것을 보이고, 마지막으로 거듭 측정된 지(至)의 그림자가 어떻게 회귀년(回歸年) 365.25일을 주는지를 말한다. 서술에는 【통설(通說)】(일반적인 견해) 또는 【일설(一說)】(하나의 견해)을 붙인다. 이 글은 서술에 그치며 예측(豫測)을 하지 않는다.

키워드: 규표(圭表); 일지(日至); 지점(至點); 측영(測影); 지중(地中); 타오쓰(陶寺); 덩펑 관성대(登封觀星臺); 회귀년(回歸年); 한대 역법(漢代曆法); 중국 역법(中國曆法)

둔황 성도
그림 2 둔황 성도(星圖)。당대 사본. 같은 유형의 성도로 이해를 돕기 위한 것.
출처: Wikimedia Commons,Dunhuang star map.jpg(公有领域/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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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허난(河南) 덩펑(登封) 가오청(告成) 마을은 북으로 쑹산(嵩山)을 등지고 남으로 지산(箕山)을 바라보며, 잉허(潁河)가 마을 가를 지난다. 마을 안에 앞뒤로 일곱 겹 이어지는 집 한 채가 있고, 가장 안쪽에 청벽돌로 쌓은 복두(覆斗) 모양의 건물이 서 있다. 관성대(觀星臺)라 한다. 대(臺)의 몸체는 십몇 미터 높이이고, 북면에 길이 36미터의 돌로 된 규(圭)가 이어져 있다. 석규(石圭)의 면에는 물길과 눈금이 새겨져 있고, 「경부(景符)」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 대는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연간에 세워졌다. 주관한 사람은 궈서우징(郭守敬)이다. 그가 이것을 세운 것은 정오의 그림자를 재기 위해서였다.

한 원(元) 시대의 천문학자가 어째서 덩펑(登封)이라는 작은 마을까지 와서 그림자를 재었는가. 그보다 앞선 이천여 년 동안, 대를 이은 사람들이 이곳을 「천지지중(天地之中)」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천지지중(天地之中)」 네 글자는 서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눈금 읽기다. 하지(夏至) 날 정오, 여덟 자[八尺]의 표(表)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꼭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이 수를 재어 낸 사람이 천하의 바로 한가운데에 선 것이다.

1. 먼저 갈라놓을 두 가지: 그림자의 방향과 그림자의 길이

앞 글에서는 증후을(曾侯乙)의 그 칠상(漆箱)을 다루고, 끝에 한 구절을 남겨 두었다. 상자의 스물여덟 별이름은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식별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날짜를 정하려면 아직 하나가 모자란다. 날마다 그림자의 길이를 재어 내는, 그 도구다.

그 도구가 규표(圭表)다.

그것을 다루기에 앞서, 한 가지를 갈라놓아야 한다. 같은 막대기 하나, 같은 그림자 하나에서, 고인(古人)은 두 가지를 읽어 내왔다.

첫째는 방향이다. 해가 뜰 때 그림자 끝을 한 번 보고, 해가 질 때 다시 한 번 보아, 두 점을 이으면 그것이 참된 동서(東西)가 된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와 『주비산경(周髀算經)』이 모두 이 방법을 말한다. 막대기 하나, 원 하나, 그림자 둘.

둘째는 장단(長短)이다. 날마다 정오에 한 번 그림자의 길이를 재면, 한 해를 재는 동안 그림자는 먼저 짧아졌다가 길어지고, 다시 짧아졌다가 길어져, 한 바퀴를 돈다. 이 한 바퀴가 한 해의 리듬이다.

방향이 묻는 것은 「어디」이고, 장단(長短)이 묻는 것은 「언제」다. 이 절에서 말할 것은 뒤의 것이다.

2. 「일지(日至)」: 해가 극에 이르는 때

먼저 한 낱말을 확인하자. 일지(日至).

옛 책의 「일지(日至)」란, 해가 하나의 극에 이른 그 순간을 말한다. 한 해에 두 번 있다. 한 번은 그림자가 가장 길고, 한 번은 가장 짧다. 가장 긴 날, 해는 정남(正南)으로 가장 멀리 치우쳐 「일남지(日南至)」라 하고, 가장 짧은 날, 해는 정북(正北)으로 가장 멀리 치우쳐 「일북지(日北至)」라 한다.

후대에 이르러 말하는 동지(冬至)·하지(夏至)는 이 두 낱말에서 자라난 것이다.

「일지(日至)」 두 글자는 매우 이르게 나타난다. 갑골복사(甲骨卜辭)에 이미 있다. 둥쭤빈(董作賓)은 이를 위해 한 권의 보(譜)를 세워 《일지보(日至譜)》라 이름하고 《은력보(殷曆譜)》에 수록했다. 그에 따르면 복사에 「일지(日至)」를 기록한 것은 모두 두 곳 보이는데, 하나는 무정(武丁)의 세대, 하나는 문무정(文武丁)의 세대에 있다. 복사에서는 「영(影)」 자를 찾지 못했고 측영(測影)의 기록도 없지만, 그 두 글자는 이미 있다. 이 한 조에는 【일설(一說)】을 붙인다. 상(商) 왕의 단대(斷代) 자체가 아직 다투어지고 있어, 이 두 조가 어느 해에 떨어지는지에 대해 각가(各家)가 내놓는 수가 서로 같지 않다.

춘추(春秋)에 이르면 기록이 단단해진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에 한 구절이 있다.

春,王正月,辛亥朔,日南至。

노(魯) 희공(僖公) 5년은 기원전 655년이다. 두예(杜預)는 이 구절에 주(注)를 달아 말한다. 「周正月,今十一月,冬至之日,日南极。」 주(周) 역법의 정월(正月)은 하(夏) 역법의 십일월(十一月)에 해당하며, 바로 동지(冬至)가 있는 달이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20년에도 한 번 더 기록한다. 「春王二月己丑,日南至。」 이번 기록은 조금 어긋났다. 동지(冬至)가 이월(二月)에 떨어졌다. 두예(杜預) 이후의 주가(注家)들은 그 까닭을 알아냈다. 그해의 역관(曆官)이 윤달(閏月)을 빠뜨려, 절기(節氣)가 그에 따라 어긋났고, 그리하여 『춘추(春秋)』의 전문(傳文)은 「동지(冬至)」라는 정명(正名)을 쓰기를 꺼리고 「일남지(日南至)」만 써서 말을 어물쩍 넘겼다. 이 일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보인다.

이 두 조는 전래 문헌(傳世文獻) 가운데 가장 이른 동지(冬至) 기록이다.【통설(通說)】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일지(日至)」는 동지(冬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례(周禮)』 「지관(地官)·대사도(大司徒)」에 「日至之景,尺有五寸」이라 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하지(夏至)를 말한다. 하지(夏至)의 그림자만이 한 자 다섯 치까지 짧아지기 때문이다. 같은 한 책 안에서, 같은 한 낱말이 다른 끝에 떨어진다.

한(漢)에 이르러 「일지(日至)」는 이미 편명(篇名)으로 쓸 수 있는 낱말이 되었다. 2018년 말, 후베이성(湖北省) 징저우(荊州) 후자가오창(胡家草場) 묘지 M12에서 전한(前漢)의 간독(簡牘)이 사천오백여 매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두 권의 역보(曆譜)가 있는데, 한 권의 간(簡) 뒷면에는 「역(曆)」, 다른 한 권에는 「일지(日至)」라 적혀 있다. 「일지(日至)」라 적힌 그 한 권은 모두 백두 매의 간으로, 한(漢) 무제(武帝) 건원(建元) 원년(기원전 140년)부터 이후 약 백 년 동안, 동지(冬至)·입춘(立春)·춘분(春分)·입하(立夏)·하지(夏至)·입추(立秋)·추분(秋分)·입동(立冬) 여덟 날이 어느 날에 떨어질지를 적고, 동지(冬至)를 맨 앞에 두었다. 이 간은 《태초력(太初曆)》이 반포되기 전에 쓰인 것이다. 무제(武帝) 때의 사람들은 이미 「일지(日至)」를 한 권의 역보(曆譜) 이름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일지(日至)」 두 글자를 만나면, 먼저 그것이 어느 날을 가리키는지 보아야 한다.

3. 표(表)와 규(圭)

다음은 기물(器物)이다.

그림자를 재는 도구를, 고인(古人)은 규표(圭表)라 불렀다. 두 글자가 두 물건을 가리킨다.

평지에 수직으로 세우는 그 막대기를 「표(表)」라 한다. 수평으로 놓고 눈금을 새겨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그 자를 「규(圭)」라 한다.

정오에 재는 데는 까닭이 있다. 하루 가운데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것은 정오이고, 「가장 짧다」는 이 위치는 붙잡기 쉽다. 정오의 그림자는 방향이 가장 바르게, 정북(正北)에 떨어진다. 정오 전후에는 그림자 길이의 변화가 가장 느려, 같은 한 각(刻) 안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므로 읽음이 어긋나기 어렵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장인(匠人)」은 일련의 동작을 자세히 적어 두었다. 「水地以县,置槷以县,眡以景。为规,识日出之景与日入之景……」 먼저 땅을 수평으로 고르고, 다림줄로 막대기를 곧게 세우고, 그다음 그 그림자를 본다. 이 대목은 방향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장단(長短)이 아니다.

표(表)는 얼마나 높이 세우는가. 옛 책에 하나의 정해진 수가 있다. 여덟 자[八尺]다.

『주비산경(周髀算經)』의 첫머리가 이 한 구절이다.

周髀长八尺,夏至之日晷一尺六寸。髀者股也;正晷者句也。

「주비(周髀)」는 표(表)를 이르는 말이고, 「비(髀)」는 고(股), 「귀(晷)」는 구(句)다. 여덟 자[八尺]의 막대기가 하지(夏至) 정오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한 자 여섯 치[一尺六寸]다.

여덟 자[八尺]라는 수는 매우 오래 쓰였다. 선진(先秦)의 산서(算書)에서도 여덟 자[八尺], 한대(漢代)의 주가(注家)도 여덟 자[八尺]라 했고,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움직였다. 너무 오래 쓰였기에 표준이 되었다. 옛 책은 그 까닭을 적지 않았다.

4. 타오쓰(陶寺)의 칠한 막대기

앞서 말한 것은 모두 종이 위의 말이다. 땅속에 물건이 있는가.

있다. 그리고 종이보다 훨씬 이르다.

2002년 가을, 산시성(山西省) 샹펀(襄汾) 타오쓰(陶寺) 유적. 고고대(考古隊)는 성지(城址) 안에서 왕급(王級)의 큰 무덤 하나를 파냈다. 번호는 ⅡM22. 묘실의 동남쪽 모서리에 나무 막대기 하나가 서 있었다.

막대기의 겉층은 옻칠이다. 먼저 전체에 흑칠(黑漆)을 한 번 바르고, 다시 구간마다 석록색(石綠色) 옻을 칠했으며, 녹색 구간의 양 끝에는 각각 분홍빛 옻 띠를 하나씩 칠해 검은 바탕과 갈라 놓았다. 막대기 전체를 보면 검은색과 녹색이 섞인 무늬다.

그 잔존 길이는 171.8센티미터. 아래 끝은 잘 남아 있고, 위 끝은 정리할 때 다소 손상되었으며, 중간에는 26.4센티미터가 썩어 흔적이 없는 한 구간이 있다. 같은 무덤의 벽감(壁龕)에는 옥종(玉琮)과 옥척(玉戚)도 놓여 있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유표(游標)·경부(景符) 따위의 부속품으로 읽는다.

막대기에는 하나의 특별한 표시가 있다. 아래 끝에서 재어 39.9센티미터 되는 곳에 표를 하나 새겼다. 타오쓰(陶寺) 사람들의 당시 한 자[一尺]는 25센티미터 안팎, 39.9센티미터를 환산하면 꼭 한 자 여섯 치[一尺六寸]다.

한 자 여섯 치는 『주비산경(周髀算經)』의 그 「夏至之日晷一尺六寸」이다.

같은 무덤에서, 또 하나 세우는 표(表)가 나왔다. 온몸에 붉은 채색을 칠한 나무 막대기로, 타오쓰척(陶寺尺)으로 환산하면 기물 전체가 아홉 자[九尺] 안팎. 쓸 때에는 이것을 땅속에 한 자[一尺] 꽂아, 지상에 여덟 자[八尺]를 남긴다. 여덟 자[八尺]의 표(表)가, 또 맞았다.

이 한 무리의 물건을, 연구자들은 현재의 고고 발견 가운데 가장 이른 규표(圭表) 의기(儀器) 실물로 판정하며,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에서 4000년으로 본다.【통설(通說)】

한 겹은 반드시 밝혀 두어야 한다. 「규척(圭尺)이 출토되었다」「세계에서 가장 이른 규표(圭表) 의기(儀器) 실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사천 년 전 사람들이 이것으로 동지(冬至)를 측정해 냈다」라고 말하려면 여지를 남겨야 한다. 옻칠한 막대기에는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설명하는 글자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측영(測影)의 규척(圭尺)인지 아닌지는 형제(形制)와 눈금, 함께 나온 기물을 모아 밀어낸 판단이며, 기물이 스스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일설(一說)】

2009년 6월 21일, 하지(夏至). 타오쓰(陶寺) 유적의 연구자들은 출토 규표(圭表)의 등대(等大) 복제품으로 한 차례 실측을 하여, 그날의 정오 영장(影長)을 재어 냈다. 이 한 걸음이 보여 주는 것은 방법이 성립하고 기물이 그에 맞는다는 것이다. 거꾸로 사천 년 전 사람들이 반드시 같은 일을 이것으로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타오쓰(陶寺)의 그 막대기 위의 1.6자[尺]는 또 다른 한 가지를 보여 준다. 하지(夏至)의 그림자 길이는 전국 일률의 수가 아니다. 그것은 위도(緯度)에 따라 간다.

5. 「지중(地中)」은 한 자의 눈금을 읽은 값

이제 비로소 「지중(地中)」을 논할 수 있다.

『주례(周禮)』 「지관(地官)·대사도(大司徒)」에 한 단락이 있는데, 「지중(地中)」이라는 말의 가장 이른 출처다.

以土圭之法,测土深,正日景,以求地中。日南则景短多暑,日北则景长多寒,日东则景夕多风,日西则景朝多阴。日至之景,尺有五寸,谓之地中。

「토규(土圭)」는 그 그림자를 재는 자다. 「측토심(測土深)」은 땅의 남북 원근을 재는 것. 토규(土圭)로 정오의 그림자를 바로잡아 「지중(地中)」을 찾는다. 그림자가 남쪽으로 치우치면 짧고 땅은 덥다. 북쪽으로 치우치면 길고 땅은 춥다. 동쪽으로 치우치거나 서쪽으로 치우치면 아침저녁의 그림자도 바르지 않다.

기준은 한 구절에 떨어진다. 하지(夏至) 정오, 그림자 길이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이곳이 지중(地中)이다.

동한(東漢)의 정현(鄭玄)이 이 책에 주(注)를 달면서, 그의 선배 정중(鄭衆)의 말을 인용해 더 분명히 말한다.

土圭之长,尺有五寸。以夏至之日,立八尺之表,其景适与土圭等,谓之地中。今颍川阳城地为然。

여덟 자[八尺]의 표(表)가 하지(夏至) 정오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꼭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의 토규(土圭)와 같은 길이가 된다. 그러한 곳은 당시 잉촨군(潁川郡)의 양성(陽城)으로 인정되었다. 양성(陽城)은 오늘날 덩펑시(登封市) 가오청(告成) 마을이다.

그 두 수를 한 번 돌아보자.

담지체 하지(夏至) 정오의 그림자 길이
타오쓰(陶寺, 진남[晉南]) 칠한 나무 막대기의 눈금 한 자 여섯 치[一尺六寸]
양성(陽城, 지금의 덩펑 가오청) 『주례(周禮)』 정현(鄭玄) 주(注)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한 치[寸] 차이다. 이 한 치는 위도(緯度)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타오쓰(陶寺)는 진남(晉南)에 있어 위도가 뤄양(洛陽) 일대보다 조금 높고, 정오의 해 높이가 낮아, 그림자는 자연히 길다.

「지중(地中)」이라는 말은 어떤 한 점을 가리키는 듯 들리지만, 실은 그 판단 기준은 하나의 읽음이다. 읽음이 바뀌면 그 점도 따라 옮겨 간다.

뒷사람들은 이 한 겹을 꿰뚫어 보았다.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은 《일경도(日景圖)》를 한 폭 그렸고, 왕잉린(王應麟)의 《곤학기문(困學紀聞)》 권구(卷九)가 그것을 인용한다. 「日行黄道,每岁有差,地中当随而转移。故周在洛邑,汉在颍川阳城,唐在汴州浚仪。」 해가 가는 길 자체가 변하고, 「지중(地中)」도 따라 옮겨 간다. 주(周)는 뤄이(洛邑)에, 한(漢)은 잉촨(潁川)의 양성(陽城)에, 당(唐)은 볜저우(汴州)의 쥔이(浚儀)에 있었다.

「지중(地中)」이 읽음을 따라 간다면, 「지중(地中)」을 재는 일은 천문(天文)일 뿐만 아니라 정치(政治)이기도 하다. 오래 타오쓰(陶寺) 발굴을 주관해 온 허누(何駑)에게 한 가지 말이 있다. 네 글자로 요약하여, 왕자축중(王者逐中). 정권이 바뀌고 도읍이 옮겨지면, 규표(圭表) 위의 그 「중(中)」의 기준도 따라 바뀐다.

「중국(中國)」의 「중(中)」, 그 근원이 여기 있다. 서주(西周) 초기의 허존(何尊) 명문(銘文)에 「余其宅兹中国」이라 한 구절이 있어, 현재 볼 수 있는 「중국(中國)」 두 글자의 가장 이른 출처다.

두 곳을 표시해 두어야 한다.

【통설(通說)】: 지중(地中) 관념의 지리적 표지는, 후대에 기본적으로 쑹산(嵩山)과 이뤄(伊洛) 일대에 고정되었다.

【일설(一說)】: 펑스(馮時)는 이르게는 6500년 전에 「지중(地中)」이 이미 타오쓰(陶寺) 일대에 있었다고 본다. 타오쓰(陶寺)와 기본적으로 같은 위선(緯線)에 있는 푸양(濮陽) 시수이포(西水坡) 큰 무덤에서, 두 곳의 하지(夏至) 그림자 길이는 거의 같다. 이 한 조는 위도(緯度)와 유적의 대응으로 미루는 것이지, 직접 증거는 아니다.

6. 하나의 「일지(日至)」에서 한 해의 길이로

하나의 「일지(日至)」를 기록해도, 그것은 그저 하루일 뿐이다. 이어서 기록해야 비로소 한 해가 나온다.

성가심은 앞에 있다. 동지(冬至) 그 순간은 늘 정오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루 가운데 어느 시각에도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을 못 박으려면, 하루하루 재어 앞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고인(古人)은 재다가 한 가지를 발견했다. 유자오(劉昭)가 보충한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명료하게 적혀 있다.

日发其端,周而为岁,然其景不复,四周千四百六十一日,而景复初,是则日行之终。以周除日,得三百六十五四分度之一,为岁之日数。

해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와도, 그림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넷째 해에 이르러서야 그림자는 다시 기점에 떨어진다. 그 사이는 천사백육십일 일. 이것을 넷으로 나누면, 한 해는 삼백육십오 일과 사분의 일 일.

그 끝자리 사분의 일 일이, 「사분력(四分曆)」이라는 이름의 내력이다. 남는 그 하루가 윤일(閏日)이다.

춘추(春秋) 말년에, 세실(歲實)은 365.25일로 정해졌다. 오늘날 공인된 회귀년(回歸年)의 길이 365.2422일과 견주면, 0.0078일만큼 길어, 한 해에 십일 분쯤 차이가 난다.

한 해 십일 분의 차이라니, 별것 아닌 듯 들린다. 천육백 년을 쌓으면 열흘이 된다. 이것은 뒷이야기다.

요는 이 한 걸음의 성질이다. 이 수는 그림자에서 하루하루 읽어 낸 것이다.

7. 이 자가 나중에 자리 잡은 곳

머리말의 그 대(臺)로 돌아간다.

양성(陽城), 즉 오늘날의 가오청(告成)은, 동한(東漢)의 정현(鄭玄)이 『주례(周禮)』에 주(注)를 달아 이름을 짚은 뒤로, 「지중(地中)」의 기본 위치가 되었다. 후대의 실측은 대개 여기서 이루어졌다.

당(唐) 고종(高宗) 의봉(儀鳳) 4년(679년), 태상박사(太常博士) 야오쉬안볜(姚玄辯)은 양성(陽城)의 측영대(測影臺)에 옛법에 따라 여덟 자[八尺]의 표(表)를 세우라는 명을 받았고, 하지(夏至) 정오에 잰 그림자는 한 자 다섯 치[一尺五寸], 옛법과 같았다.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11년(723년), 태사감(太史監) 난궁웨(南宮說)가 또 이곳에 돌로 된 표(表)를 하나 새겼다.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 하남부(河南府) 양성현(陽城縣) 아래에 「有测景台」라 한 구절이 있는데, 이 일을 말한다.

더 내려가 원(元) 시대에, 궈서우징(郭守敬)은 개력(改曆)을 주관하여 「사해측험(四海測驗)」을 위해 전국에 스물일곱 곳의 관측점을 세웠다. 덩펑(登封)의 이 한 곳이 그 관성대(觀星臺)다.

관성대(觀星臺)는 확대된 규표(圭表)다. 복두(覆斗) 모양의 대신(臺身)이 표(表), 대 아래의 그 긴 돌로 된 규(圭)가 자이며, 치수는 옛 제도보다 몇 배 크다. 확대에는 까닭이 있다. 표(表)가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지고, 같은 한 치[寸]의 눈금이 나타내는 시각은 더 잘게 나뉜다. 대신(臺身)의 그 「경부(景符)」는, 높은 표(表)의 그림자 가장자리가 흐려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얇은 동판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림자 가장자리를 하나의 가는 선으로 거두어, 읽음이 비로소 정확해진다.

타오쓰(陶寺)의 그 일 점 칠 미터 옻칠 막대기에서, 덩펑(登封)의 이 십몇 미터 대(臺)까지, 그 사이에 삼천여 년이 가로놓여 있다. 재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오의 그 그림자다.

덩펑(登封) 관성대(觀星臺) 이전의 실측 전통이란, 바로 이 한 구간을 이른다.

허난(河南)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그 「중(中)」은, 근원을 여기까지 더듬을 수 있다. 하나의 읽음을, 이천여 년 동안 재어 온 것이다.

텍스트에 대하여

이 글은 통속적인 해설이며, 독자적인 연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한 천문 상수는 표준적인 값이다. 이 한국어판은 중국어 원문과 같은 글의 다른 언어판으로서 함께 공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은 邝楚嘉, Chujia Kuang. 필명은 嘉言一得(Jiayan Yide)이다.

중국의 척도(尺度)는 본래의 단위 그대로 남겼다. 타오쓰(陶寺) 시대의 자[尺](chi)는 25센티미터 안팎, 치[寸](cun)는 자의 십분의 일이다.

선언

자금 지원. 이 연구는 외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이해 상충. 저자에게 신고할 이해 상충은 없다.

자료 이용 가능성. 이 연구에서 새로 작성하거나 분석한 자료는 없다.

언어. 중국어 원문은 이 기록의 부속 파일로 등록되어 있다.

인용과 출처

[1] 左傳 [좌전]. 先秦.

[2] 周禮 [주례]. 先秦.

[3] 周髀算經 [주비산경]. 漢.

[4] 漢書 [한서]. 漢.

[5] 後漢書 [후한서]. 南朝宋.

[6] 新唐書 [신당서]. 宋.

[7] 董作賓. 殷曆譜 [은력보]. 1945.

[8] 荊州博物館, 蔣魯敬, 李志芳. 胡家草場簡牘的若干個「最」 [후자가오창 간독의 몇 가지 「최」]. 人民日報 [런민일보], 2020-02-08(05).

[9] 何駑. 都城中的早期「中國」 [도성 가운데의 초기 「중국」]. 人民日報 [런민일보], 2025-10-02.

[10] 山西省文物局. 臨汾陶寺為何是最早「中國」:從陶寺遺址發掘的圭尺說起 [린펀 타오쓰는 왜 가장 이른 「중국」인가: 타오쓰 유적 발굴의 규척으로부터]. 2021-09-08.

[11] 中國新聞網. 中國天文,從4000年前的「立竿見影」談起 [중국 천문, 4000년 전의 「입간견영」으로부터].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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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모든 데이터는 邝楚嘉가 수집·정리하였다.


作者:嘉言一得(邝楚嘉)|独立研究者,致力于可核验的原始文献与历法数据归档。
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平实记录 · 数据集 · 预印本:GitHub / WordPress / Zenodo(DOI: 10.5281/zenodo.22788686 / 10.5281/zenodo.23028692)
Records · Datasets · Preprints: GitHub / WordPress / Zenodo
学术身份 · Academic identity:ORCID 0009-0002-7650-833X | OpenAlex A5151908354

증후을(曾侯乙) 묘 칠상(漆箱) 이십팔수도(二十八宿圖):사상(四象) 체계의 하한(下限)

最后修订时间:202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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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jia Kuang(邝楚嘉)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Chujia Kuang, 독립연구자, 중국 광둥성 제양. Correspondence: kuangchujia.com/contact

요지

1978년, 후베이성(湖北省) 수이현(隨縣, 지금의 수이저우시[隨州市]) 레이구둔(擂鼓墩)에서 고고대(考古隊)가 전국(戰國) 시대의 묘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검은 옻칠 바탕 위에 주홍으로 글자가 한 바퀴, 스물여덟 글자가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전서(篆書)로 큰 「두(斗)」 자가 있었다. 고리 바깥, 양 끝에 각각 동쪽에는 용(龍)이, 서쪽에는 호(虎)가 그려져 있었다. 이 상자는 지금 이십팔수도(二十八宿圖) 의상(衣箱)이라 불린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유래를 말하는 이상 이것을 지나칠 수 없다.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구절이 습관처럼 덧붙는다. 이 상자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고, 사상(四象)도 있다, 라고.

채칠 이십팔수도 의상 상자, 전국시대, 후베이성 박물관 소장
그림 1 채칠 이십팔수도 의상 상자(彩漆二十八宿圖衣箱). 전국시대, 길이 71cm, 너비 47cm, 높이 40.5cm. 뚜껑 중앙에 주서(朱書)로 「斗」자를 쓰고 그 둘레에 이십팔수를 배열했으며 양쪽에 청룡·백호를 그렸다. 모서리에 「止匫」이라 새겨 옷을 넣는 상자임을 밝혔다. 후베이성 박물관 소장.
출처: Google 아트 앤 컬처 「증후을(曾侯乙)·칠기」 특집(후베이성 박물관 제공)
저작권은 원저자나 원기관에 있습니다. 삭제가 필요하면 본 사이트로 연락해 주십시오.

이 한 구절은 따져 볼 가치가 있다. 출토품이 주는 것은 「늦어도」— 하한(下限)이며, 「언제부터」— 상한(上限)은 아니다. 이 뚜껑의 스물여덟 이름은 지금도 한 자씩 읽히고, 용(龍)과 호(虎)도 분명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상(四象)」이란 네 마리 짐승이며, 이 뚜껑에 보이는 것은 둘뿐이다. 이 말 아래에는 세 개의 별개 층이 있다. 스물여덟 이름이 하나의 닫힌 목록으로 모이는 것, 그 목록이 네 방위에 따라 일곱씩 네 무리로 나뉘는 것, 그리고 각 무리에 짐승 한 마리가 짝지어지는 것. 셋은 함께 오지 않는다. 이 상자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짐승과 방위의 짝에 관한 가장 이른 단단한 증거는 허난성(河南省) 푸양(濮陽)의 시수이포(西水坡) 묘다. 그곳에서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용·호와 두(斗)가, 조개껍데기의 방사성탄소측정과 나이테 보정으로 지금으로부터 6460년±135년으로 연대가 매겨지며, 별 이름은 하나도 없다. 네 짐승이 나란히 기록되는 것은 동한(東漢)에 이르러서다. 따라서 하한(下限)은 서로 다른 세 깊이에 있고, 약 6500년 전부터 동한(東漢)까지에 걸친다. 칠상(漆箱)이 닿는 것은 그 두 번째까지다. 이 글은 서술에 그치며 예측(豫測)은 하지 않는다.

마왕퇴 한묘 백서
그림 2 마왕퇴 백서(帛書)。창사 마왕퇴 3호 한묘 출토 백서. 같은 유형의 자료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오성점(五星占)》이나 《천문기상잡점(天文氣象雜占)》의 원물이 아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Mawangdui Silk Texts 1.JPG(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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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증후을(曾侯乙); 칠상(漆箱); 이십팔수(二十八宿); 사상(四象); 시수이포(西水坡); 하한(下限); 전국 천문학(戰國天文學); 한대 천문학(漢代天文學)

머리말

1978년, 후베이성(湖北省) 수이현(隨縣, 지금의 수이저우시[隨州市]) 레이구둔(擂鼓墩)에서 고고대(考古隊)가 전국(戰國) 시대의 묘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검은 옻칠 바탕 위에 주홍으로 글자가 한 바퀴, 스물여덟 글자가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전서(篆書)로 큰 「두(斗)」 자가 있었다. 고리 바깥, 양 끝에 각각 동쪽에는 용(龍)이, 서쪽에는 호(虎)가 그려져 있었다.

이 상자는 이십팔수도(二十八宿圖) 의상(衣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유래를 말하는 이상 이것을 지나칠 수 없다. 이르기 때문이다.

지나칠 수 없는 것만이 아니다. 한 구절이 더 덧붙는다. 이 상자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고, 사상(四象)도 있다, 라고.

이 한 구절은 한 번 멈춰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상자의 스물여덟 글자는 지금도 한 자씩 읽히고, 용(龍)과 호(虎)도 분명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상(四象)」이란 네 가지 것 — 용(龍)·호(虎)·새·거북뱀 — 이며, 뚜껑에 보이는 것은 둘뿐이다. 나머지 둘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 겹이 더 있다. 이 상자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433년 무렵으로 본다. 앞의 한 구절에서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중국 고대의 사상(四象) 체계는 전국(戰國) 초기에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라고.

그것은 조금 서두른 한 걸음이다. 이하에서는 이 한 구절을 분해하여, 그것이 얼마만 한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묻는다.

1. 실물 하나가 잡을 수 있는 것

고고학 보고에는 자주 지나쳐 버리는 한 문장이 있다. 실물 하나가 주는 것은 「늦어도」라는 것이다.

땅에서 나무패 하나가 나왔는데 「정월(正月)」이라 적혀 있고 연대가 2300년 전으로 측정되었다고 하자.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2300년 전에는 이미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달을 불렀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부름이 그해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패가 묻힐 무렵에는 그 용법이 이미 한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패가 답하지 않는다.

연대학에서는 앞의 것을 하한(下限, 늦어도), 뒤의 것을 상한(上限, 일러도)이라 한다. 실물 하나가 보통 잡을 수 있는 것은 하한(下限)뿐이며, 상한(上限)은 잡을 수 없다.

하한(下限)만으로도 이미 가치가 있다. 어떤 체계의 발명 연도를 「알 수 없음」에서 「늦어도 몇 년」으로 좁혀 준다. 곤란한 것은 하한(下限)을 상한(上限)으로 써 버리는 순간이다. 「늦어도 이미 있었다」가 「이해부터만 있었다」로 읽힌다.

이것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글이다. 앞의 두 글은 무엇이 계산될 수 있는지, 어떤 몇 안 되는 기록을 결코 계산해서는 안 되는지를 물었다. 이 글은 방향을 바꾼다. 어떤 체계의 어느 쪽 끝을 실물이 잡을 수 있는지, 잡을 수 없는 폭을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2. 이 상자

상자의 생김새를 여기서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세부다. 그것이 모두 첫 구절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개략. 의상(衣箱)이라 할 만한 나무 상자로, 뚜껑과 몸체는 각각 나무 한 덩어리를 파서 만들었다. 뚜껑은 활 모양이고, 안쪽은 붉은 옻칠, 바깥은 검은 옻칠을 바탕으로 주홍 무늬가 그려져 있다. 길이 71센티미터, 너비 47센티미터, 전체 높이 40.5센티미터. 같은 묘에서 비슷한 형식의 의상(衣箱)이 다섯 개 나왔다. 성도(星圖)를 실은 것은 E.66이라는 번호가 붙었고, 나머지 가운데 E.61에는 후예(后羿)가 해를 쏘는 그림, E.67에는 과보(夸父)가 해를 쫓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뚜껑 앞면의 정확히 가운데에 전서(篆書)의 「두(斗)」가 있다. 이 글자를 둘러싸고 스물여덟 글자가 한 바퀴 돈다. 현지 초(楚)의 이체자(異體字)로 쓰였고,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로부터 빙 둘러 진(軫)에 이른다. 고리 바깥, 동쪽과 서쪽 면에 한쪽에는 용(龍), 한쪽에는 호(虎)가 그려져 있다. 뚜껑의 두 단면에는 각각 한 무리의 장식이 있고, 두 긴 옆면 가운데 한 면에는 두 짐승이 마주 보는 그림, 다른 한 면에는 붉은 띠만 있다.

독자가 멈추어 볼 만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첫째는 「두(斗)」 자다. 이것을 방위에 따라 획으로 나누는 사람이 있다. 가로획의 양 끝은 각각 심(心)과 위(危)를 가리키고, 세로획의 끝은 장(張)을 가리키며, 자루 끝은 자휴(觜觿)를 가리킨다. 만약 실제 하늘을 따르면 자루가 가리키는 곳은 오히려 필(畢)에 떨어져야 한다. 잘못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흔히, 뚜껑의 그림이 어느 특정한 밤의 실제 하늘을 옮겨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서 그려진 그림에 가깝다는 것을 보이는 데 쓰인다.

둘째는 항(亢) 옆의 네 작은 글자, 「갑인삼일(甲寅三日)」이다. 이를 옛 역법(曆法)과 견주어, 이 그림은 기원전 433년 정월 초사흘 저녁의 하늘을 그린 것이며, 그날은 마침 입춘(立春) 전후에 해당하여 옛 예법으로 적전(籍田) 의식을 거행하던 날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일설(一說)】. 이 네 글자가 어느 해, 어느 일을 가리키는지에는 다른 읽기도 있다.

셋째는 나열 방향이다. 뚜껑의 스물여덟 글자는 시계 방향으로 흐른다. 후대의 성도(星圖)와는 반대다. 궈더웨이(郭德維)는 하나의 설명을 내놓았다. 그린 사람은 활 모양의 뚜껑을 둥근 하늘의 덮개로, 네모난 상자의 바닥을 땅으로 보았다. 땅에 선 사람은 하늘 덮개를 올려다보고, 이 뚜껑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순서가 뒤집힌다. 이 설명을 따르면, 방향의 차이는 곧 내려다봄과 올려다봄의 차이다.

셋을 합치면 이 기물의 정체는 거의 분명하다. 그릇 위의 명문(銘文)이지, 관측의 기록이 아니다.

상자 자체의 연대에는 두 값이 있다. 기원전 433년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값이며【통설(通說)】, 기원전 435년이라는 제안도 있다【일설(一說)】. 두 수는 2년 차이지만, 이 글이 내려야 할 판단에는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값을 취하고, 일을 너무 굳게 잡지 않는다.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한 구절이다. 늦어도 기원전 433년 무렵에는, 스물여덟 별이름과 그 순서, 거기에 「두(斗)」 하나, 또한 동쪽의 용(龍)과 서쪽의 호(虎)가 이미 사람들의 공유된 앎이었고, 옷을 넣는 상자의 뚜껑에 가볍게 그려져 있었다.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먼저 「사상(四象)」이라는 말을 분해해야 한다.

3. 사상(四象) 아래에는 세 층이 있다

하늘의 편에서 말하는 「사상(四象)」이란, 이십팔수(二十八宿)가 네 방위에 따라 일곱씩 네 무리로 나뉘고, 각 무리에 짐승 한 마리가 짝지어지는 것을 말한다. 동쪽의 청룡(青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다.

이것은 사실 세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스물여덟 이름이 하나의 닫힌 목록으로 모이는 것.

둘째는, 그 목록이 네 방위에 따라 일곱씩 네 무리로 잘리는 것.

셋째는, 네 무리 각각에 짐승 한 마리가 짝지어지는 것.

셋은 함께 오지 않는다. 잇달아 나타날 수도 있고, 둘째에서 멈출 수도 있다. 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 「요전(堯典)」의 사중중성(四仲中星)을 논할 때, 그 네 별이 각각 한 상(象)의 안쪽에 선다고 하였다. 그것은 세 층이 모두 갖추어진 뒤에야 성립하는 배치다.

먼저 첫째 층부터. 스물여덟 이름이 하나의 닫힌 목록으로 모이는 것은 훨씬 늦다. 그 전에 문헌의 별이름은 흩어져 있다. 은허(殷墟)의 복사(卜辭)에는 조성(鳥星)이 있고 대화(大火)가 있으며, 은(殷) 사람들이 이미 알고 기록에 사용한 별이다. 『시경(詩經)』과 『하소정(夏小正)』에는 기(箕)가 있고 두(斗)가 있으며 진(辰)이 있고 삼(參)이 있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모두 거기 있다. 다만 하나의 장부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 글에서 은(殷) 사람이 상당한 별을 알았으나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좌표는 갖지 못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구간을 가리킨다. 격자가 그어진 것은 후대이며, 얼마나 뒤인지는 아래에 하한(下限)이 보인다.

이제 가장 이른 끝으로 찾아가 보자.

1987년, 허난성(河南省) 푸양(濮陽)의 시수이포(西水坡)에서 앙소(仰韶) 문화의 묘에서, 피장자의 동쪽에 조개껍데기로 용(龍)이, 서쪽에 호(虎)가 놓이고, 그 사이에 조개껍데기와 사람 뼈로 만든 두(斗)가 있었다.

이 묘의 연대에는 한 벌의 수를 여기 적어야 한다.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 고고연구소(考古研究所) 실험실이 이 묘의 조개껍데기에 방사성탄소측정을 하였고, 나이테로 보정한 결과는 6460년±135년이다. 또 한 벌은 허우강(後岡) 유형에서 추정한 것으로,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4100년 사이다. 이 글은 방사성탄소 값을 취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6500년 전」이라 쓰고, 오차는 ±135년으로 적는다.

별 이름은 없다. 하나도 없다. 시수이포(西水坡)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용(龍)과 호(虎)라는 두 개의 상(象)이 동과 서에, 두(斗)를 사이에 두고, 매우 이르게 놓였다. 방위를 나열한 증거로는 가장 단단한 하나다. 그것이 다스리는 범위는 이십팔수(二十八宿)와 관계가 없다.

이 묘에서 증후을(曾侯乙)까지는 약 4천 년의 간격이 있다. 4천 년 전에는 용·호·두가 있고, 4천 년 뒤에는 스물여덟 이름에 용·호·두가 더해진다. 두 점을 이으면 아주 긴 하나의 선이 그어진다. 짐승과 방위의 대응은 매우 오래되었고, 끊긴 적이 없다.

선의 중간은 비어 있다.

4. 그 후: 네 짐승은 몇 단계로 갖추어지는가

증후을(曾侯乙)의 상자 뚜껑에는 한눈에 둘이 보인다. 넷이 갖추어지는 것은 뒤의 재료에서 찾아야 한다. 그 길은 길다.

먼저 경전(經典) 속의 수를 본다. 『주례(周禮)』「춘관(春官)」에 풍상씨(馮相氏)라는 관직이 있고, 그 직무는 「十有二歲、十有二月、十有二辰、十日、二十有八星之位」다. 이 구절은 앞 글에서도 인용했다. 여기서는 다른 말을 하기 위해 빌린다. 경전에는 「二十八」이라는 수가 있고, 스물여덟 이름을 한 번도 열거하지 않는다. 수는 왔다. 목록은 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목록을 본다. 전래 문헌(傳世文獻)에서 스물여덟 이름이 한꺼번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전국(戰國) 말기의 『여씨춘추(呂氏春秋)』「유시(有始)」다.

「天有九野……中央曰鈞天,其星角、亢、氐;東方曰蒼天,其星房、心、尾……」

이름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나누는 법을 보라. 아홉이다. 가운데가 하나, 네 방위에 넷, 네 모서리에 넷, 합쳐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아홉 몫으로 자른다. 네 방위에 일곱씩이라는 자르기는 이 글에는 아직 없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만하다. 구야(九野)의 나눔에서 가운데 몫에는 각(角)·항(亢)·저(氐)가 들고, 동방(東方)의 몫에는 방(房)·심(心)·미(尾)가 든다. 한 몫에 세 수(宿), 또 한 몫에 네 수(宿)로, 뒤의 네 방위 일곱 수(宿)라는 가지런한 자르기와 맞지 않는다. 구야(九野)가 다스리는 것은 방위와 성토(星土)이며, 그것이 나누는 것은 사상(四象)이 아니다.

같은 전후의 해에도 다른 판본이 있다. 2021년에 공간된 칭화대학(清華大學) 소장 전국죽간(戰國竹簡) 제11집에 「오기(五紀)」라는 한 편이 있고, 전국(戰國) 중만기의 초(楚) 문서인데, 이것도 완전한 이십팔수(二十八宿) 한 벌을 포함한다. 정리자의 석문(釋文)에 따르면 칠상(漆箱)의 한 벌과 꼭 같지는 않다. 서방(西方) 일곱 수(宿)에서는 「필(畢)」이 아니라 「탁(濁)」이라 쓰고, 삼(參)과 벌(伐)을 두 개의 독립된 수(宿)로 두어 하나로 합치지 않으며, 남방(南方)에서는 정(井)·귀(鬼)가 아니라 랑(狼)·호(弧)를 쓴다.

한(漢)에 이르면 일은 풀리기는커녕 더 얽힌다.

전한(前漢) 초기의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은 다섯 방위를 나열하고 각각에 짐승 한 마리를 배한다.

「東方,木也……其獸蒼龍」「南方,火也……其獸朱鳥」「中央,土也……其獸黃龍」「西方,金也……其獸白虎」「北方,水也……其獸玄武」

세어 보라. 다섯 마리다. 가운데에 노란 용(龍)이 하나 더 붙는다.

더 나아가,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에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궁(四宮)을 쓰고, 네 구절로 시작한다.

「東宮蒼龍,房、心。」「南宮朱鳥,權、衡。」「西宮咸池,曰天五潢。」「北宮玄武,虛、危。」

동궁(東宮)은 청룡(青龍), 남궁(南宮)은 주작(朱雀), 북궁(北宮)은 현무(玄武). 그런데 서궁(西宮)은 「함지(咸池)」로 쓰여 있다. 함지(咸池)는 성관(星官)의 이름이지, 짐승이 아니다. 「백호(白虎)」 두 글자는 「천관서(天官書)」의 다른 곳에 나와 삼(參) 아래에 붙어 있다. 그것은 이 수(宿)의 상(象)이지, 서궁(西宮)의 이름이 아니다.

즉 이렇다. 전한(前漢) 초기에 이르기까지, 서궁(西宮)은 아직 문자 위에서 짐승의 이름으로 바뀌지 않았다.

넷이 나란히 기록되는 것은 동한(東漢)에 이르러서야 정해진다. 장헝(張衡)의 『영헌(靈憲)』에 한 구절 있다.

「蒼龍連蜷於左,白虎猛據於右,朱雀奮翼於前,靈龜圈首於後。」

여기에 이르러 네 방위·네 짐승·하나의 정해진 배치가 마침내 문자의 기록에 도달한다.

5. 그렇다면 하한(下限)은 어디인가

위의 재료를 세 층에 놓으면 답은 저절로 나온다.

층 하한(下限) 근거
동쪽에 용(龍), 서쪽에 호(虎), 사이에 두(斗) 지금으로부터 6460년±135년 (조개껍데기 방사성탄소측정, 나이테 보정) 푸양(濮陽) 시수이포(西水坡) 45호묘의 조개껍데기 도상(圖像)
스물여덟 이름과 그 순서가 한 벌이 됨 기원전 433년 무렵 증후을(曾侯乙) 묘 칠상(漆箱) E.66
이십팔수(二十八宿)가 네 방위로 일곱씩 네 무리로 나뉘고 각 무리에 짐승 하나 동한(東漢) 장헝(張衡) 『영헌(靈憲)』; 전한(前漢) 『사기(史記)』의 서궁(西宮)은 아직 「함지(咸池)」

세 연대는 6500년 전부터 동한(東漢)까지에 걸친다. 모순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 가지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구절로 돌아간다. 이 상자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고 사상(四象)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뒷받침되는 것은 앞의 절반이다. 이 상자는 스물여덟 이름을 주고, 두(斗)를 주고, 용(龍)과 호(虎)를 준다. 「사상(四象)」이 넷이 다 갖추어진 짐승을 뜻한다면, 그것은 몇 세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읽기도 있다. 황젠중(黃建中) 등은 상자의 여섯 면을 평평하게 펼쳐, 남면(南面)의 도안이 바로 남쪽을 나타내는 새이며, 북면(北面)은 검게 칠해져 현무(玄武)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 읽기가 성립한다면, 사상(四象)은 실은 칠상(漆箱) 위에 다 갖추어진 셈이 된다. 다만 뚜껑 위가 아니라 다른 면에 나뉘어 실려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설(一說)】이며, 도안(圖案)의 동정(同定)에 서 있다. 남면이 새라는 것은 논할 수 있다. 검은 면이 현무(玄武)에 해당하는지는 더욱 추론에 기댄다. 문자의 직접 증거는 이렇게 에두르지 않는다. 도안(圖案)은 눈으로 읽고 논해야 한다. 두 종류의 증거는 무게가 같지 않고, 읽을 때에는 따로 세어야 한다. 증거가 도안(圖案)일 때, 거기서 끌어낸 읽기는 【일설(一說)】이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서술은 이렇다. 증후을(曾侯乙) 묘의 칠상(漆箱)은 이십팔수(二十八宿) 체계의 하한(下限)을 전국(戰國) 초기로 잡고, 동시에 용(龍)과 호(虎)를 주어 「짐승과 방위의 대응」이라는 선을 아래에서 잇는다. 네 짐승이 다 갖추어지는 단계는 기물에서도 문헌에서도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무엇이, 중국에 그렇게 이르게 사상(四象)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말을 만나면, 먼저 셋을 물으면 된다. 어느 층을 말하는가. 문자에 기대는가, 도안(圖案)에 기대는가. 주어진 것은 하한(下限)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뚜껑의 스물여덟 이름은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확인하기 위해 놓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연대를 정하려면 아직 하나가 모자란다. 날마다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일이다.

텍스트에 대하여

이 글은 통속적인 해설이며 독자적인 연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용한 천문 상수는 표준적인 값이다. 이 한국어판은 중국어 원문과 같은 글의 다른 언어판으로서 함께 공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은 邝楚嘉, Chujia Kuang. 필명은 嘉言一得(Jiayan Yide)이다.

중국어 술어는 그 말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는 원래의 한자 그대로 남겼다.

선언

자금 지원. 이 연구는 외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이해 상충. 저자에게 신고할 이해 상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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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중국어 원문은 이 기록의 부속 파일로 등록되어 있다.

인용과 출처

[1] 周禮 [주례]. 先秦.

[2] 呂氏春秋 [여씨춘추]. 先秦.

[3] 淮南子 [회남자]. 漢.

[4] 史記 [사기]. 漢.

[5] 張衡. 靈憲 [영헌]. 漢.

[6] 湖北省博物館. 曾侯乙墓 [증후을묘]. 北京: 文物出版社, 1989.

[7] 濮陽西水坡遺跡考古隊. 河南濮陽西水坡遺址發掘簡報 [허난 푸양 시수이포 유적 발굴 간보]. 文物 [문물], 1988(3).

[8] 清華大學出土文獻研究與保護中心. 清華大學藏戰國竹簡(拾壹) [칭화대학 소장 전국죽간 제11집]. 上海: 中西書局, 2021.

[9] 黃建中等. 擂鼓墩一號墓天文圖象考論 [레이구둔 1호묘 천문 도상 고론]. 華中師院學報 [화중사원학보], 1982(4).

[10] 湖北省人民政府. 《二十八宿圖》衣箱 [이십팔수도 의상]. 荊楚文物·古藏文物, 2015.

이 글의 그림은 보충 설명을 위한 것이며, 증거가 아니고 사실의 근거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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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모든 데이터는 邝楚嘉가 수집·정리하였다.


作者:嘉言一得(邝楚嘉)|独立研究者,致力于可核验的原始文献与历法数据归档。
Author: Chujia Kuang (邝楚嘉), pen name Jiayan Yide (嘉言一得) — independent researcher devoted to archiving verifiable primary sources and calendar data.
平实记录 · 数据集 · 预印本:GitHub / WordPress / Zenodo(DOI: 10.5281/zenodo.22788686 / 10.5281/zenodo.23028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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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术身份 · Academic identity:ORCID 0009-0002-7650-833X | OpenAlex A5151908354